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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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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곡상모동에 대한 글을 시작하면서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 779~ 843)의 심은자불우(尋隱者 不遇, 숨은 이를 찾았는데 만나지 못했네)란 시를 소개하였다. 마지막 귀절의 ”운심부지처(雲深不知處)“ 때문이었다.
사곡상모동의 지형 가운데서도 특히 상모동의 망태골과 양지뜸 주변이 무엇인가 신비하고 아늑해서 옛 선비들은 은거하거나 공부를 위해, 또는 돌림병을 피하고 시모임이나 야유회를 가지기 위해 이곳을 찾아들면서 ”구름이 깊어서 알 수 없는 곳“, 운심부지처를 연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옛 선비들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을 ”부지동(不知洞)“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부지동에 대한 용례는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선생이 정리한 위암선생 서간집과 위암문집에서 여럿 확인되고 있다. 장지연 선생이 마산에서 돌아가시자 구미의 선비 이십여 명이 마산으로 만장을 보내거나 제문을 전달하였고, 일부는 직접 현지로 가서 문상하였다.
상모동에 살았던 가까운 사돈이자 절친이기도 했던 이우옥(李愚鋈, 1860~1934)도 마산으로 절절한 만장을 보냈다.
(輓章) 李愚鋈
金烏 嵩山 下, 誰知 不知谷, 금오 숭산 아래 부지곡을 누가 알리오.
白雲 深 復深, 居然 爲 公屋, 흰구름 깊고 깊은데 공(=장지연)이 살았다네.(이하 생략)
위암 장지연 서간집 3권 1091번 편지는 상모교회의 첫 신자 정인백(鄭寅伯)이 위암선생께 보낸 편지가 들어있다. 편지에 사용된 정인백의 주소는 부지동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부지동 역시 모래와 관련이 있다. 경상도 방언으로 모래는 ”몰개“이다. 상모사곡동의 마을 이름을 ”몰개동“으로 하였으니, 얼핏 들으면 ”모르겠다“는 뜻으로 들릴 법하다. 다음의 장면을 상정해 보자.
외지인 또는 선비: 마을 이름이 무엇이오.
주민: ”몰개동“이오.
선비: ”모르겠다“란 말인지???
위암 장지연 선생은 1882년 이웃의 벽진이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결혼하자마자 1884년 상모동 용전(龍田)으로 이사하였으며, 자녀로서 아들 셋은 모두 상모동에서 출생하였다. 장자 재식(在軾, 1886~1953), 가장 사랑했던 둘째 재철(在轍, 1890~1918), 셋째 재륜(在輪, 1896~?)이다. 셋 모두 1906년 이후 서울로 옮겨 근대식 중등교육을 받았고, 둘째 재철은 1907년 멀리 중국 상해의 대동회관(大同會館)에 유학을 보냈다. 1908년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중국의 남경에서 부친이 죽을 고비를 넘기자 급거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위암 장지연 서간집 1권 260번, 271번은 부지동의 김형배(金亨培)가 장지연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사곡동과 상모동에 지금도 많이 거주하는 김해김씨 안경공파의 인물로 짐작된다. 특히 두 번째 편지는 을사년(1905년) 8월(=양력 9월)에 보낸 것인데, 위암 선생이 11월 20일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을 발표하기 두 달 전이다.
위암 선생은 모로동기에 이웃의 많은 이들과 교류했고, 그래서 이곳의 역사와 풍습 마을의 유래를 잘 알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런 흔적이 다음의 선진 익진(善進 益進)이라는 황성신문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내용은 하구미면에서 주민 대표들이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고, 유지방침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善進 益進
황성신문 1908년 6월 25일 1면 5단 雜 報
善山郡 下龜尾面內에 有志 紳士 張洪錫 玄相弘 李相根 丁大龍 金基弘 諸氏가 私立 善進學校를 剏設고 學員을 募集야 日加 月增 該校 維持方針을 諸氏가 熱心 研究야 漸至 擴張기로 高明 敎師를 延聘다더라.
번역: 선산군 하구미면 내에 유지 신사 장홍석, 현상홍, 이상근, 정대룡 제씨가 선진학교를 창설하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날로 증가하는데, 학교 유지방침을 여러 사람들이 열심 연구하여 점차 확장하기로 하고 뛰어난 교사를 모집한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