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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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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곡 간이역 유치운동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하면 주민운동 또는 주민자치운동이다. 그 주역은 본격적으로 근대식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은 1937년생 이팔봉이다. 또 이런 이팔봉을 도운 협력자는 나이가 세 살이나 많으면서도 초중등 동기인 1934년생 박정효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1970년대에 대구로 이주하여 지금도 1주일에 한두 번은 꼭 만나면서 그야말로 평생의 동반자로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박정효는 1957년 대구사범을 졸업하고,광평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초등교사로 부임하였다.
사곡역 유치운동에서 두 사람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근대식 고등교육을 받은 두 사람은 시대의 흐름을 앞서 읽는 데다가, 오랜 우정으로 서로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곡역 유치운동의 전반을 통틀어 함께 마을 대표들을 만났으며 주민서명을 모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은 서명이 37개 마을 16,490명에 이른다. 박정효의 고향마을인 장동과 신부동, 신평동, 비산동, 파계, 매호 주민들의 서명은 박정효와 동행했기에 더욱 수월했고, 인동면 지역도 박정효의 친인척들이 많아서 두 사람의 협력은 함께 할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이른바 시너지 효과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곡역 유치운동 과정에서 이팔봉의 활동의 폭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왕성하였다. 그는 오태와 북삼 지역 주민들의 서명까지 받아나갔다. 이팔봉이 칠곡군 북삼면까지 서명을 확대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칠곡군에는 당대의 정치 거물인 창랑 장택상(張澤相, 1893~ 1969)이 약목과 구미 사이의 중간역이라면 북삼에 역을 개설해야 효과적이라며 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창랑의 정치역정은 수도경찰청장이던 해방 직후에 비해 날이 갈수록 험난해졌다. 1952년부터 반대 이승만을 내걸면서 야당의 길에 들어섰고, 1961년 5.16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활동의 전면에 나서서 사망하는 날까지 반독재 야당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 반대급부는 혹독하기 짝이 없어서 1963년 11월 제6대 민의원 선거에서 그만 무명의 공화당 후보에게 낙선하고 말았다. 이런 창랑이 북삼에 역을 개설한다고 나섰으니 사곡역 유치운동은 강력한 경쟁자를 복병(伏兵)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사곡역인가? 북삼역인가?
유치 경쟁은 마치 박정희와 장택상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는 호사가들의 보는 평가일 뿐 결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미 사곡역 개설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창랑과 박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치열하게 사사건건 부딪쳤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인정하는 동향의 선후배 사이였다. 둘 사이의 정치적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었지만 고수들끼리만 통하는 천부적인 교감으로 상호존중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래 저래 수세(守勢)에 몰리게 된 장택상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북삼에 가건물 형태의 역사(驛舍)를 세웠고, 그 가건물은 상당 기간이나 북삼을 우두커니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9년 7월 창랑이 폐암으로 투병생활에 접어들자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 서신을 비서실장에게 주어 대신 병문안을 다녀오게 하였고, 8월 1일 끝내 사망에 이르자 대통령은 창랑을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특별공로자로 애국적 업적을 인정하여 국민장과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품격 있는 정치가 아니겠는가.
오태에는 장석룡, 장승원, 장택상 3대가 있고, 임은동에는 의병장 방산 허훈과 왕산 허위 선생 형제와 동북항일연군의 허형식(1909~1942) 장군이 있으며, 상모동에는 황성신문의 주필을 맡은 위암 장지연(1864~1921) 선생이 있고, 박정희 대통령과 박상희 (1905~1946) 형제가 있다. 이처럼 상모와 임은, 오태는 구미시 근대화의 출발점이자 근현대사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상모동의 위암 장지연은 일찍이 독립협회에 참가하였고, 준정당 단체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를 창설하여 국민 전체를 상대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상희는 1927년 1931년까지 신간회 선산지회의 주역이였으며, 구미에서 1945년 이후의 해방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모동과 사곡동에는 오래 전 전통사회로부터 전해 내려온 오래된 동계(洞契)가 있다. 상모의 모로실회와 사곡의 모래실회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의 향약, 두레, 품앗이도 전통사회의 오래된 주민자치활동이다. 더하여 사곡동에는 풍물패와 놀이패도 있었는데 이는 마을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세대를 이어서 전해져 내려온 마을 공동의 문화적 자산이었다. 마을의 동구 밖에는 오래 된 상여집이 197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다. 모두 동계에서 관리하는 마을재산이다. 이처럼 동계는 전통사회에서 마을 또는 동리의 복리증진과 상호부조를 위하여 공유재산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자치 조직이었다. 해마다 설, 추석, 단오 가 되면 세시풍속을 즐겼고, 풍물패와 놀이패는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을 밟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전통사회에서 이루어진 동계에서 마을자치를 온몸으로 배운 이팔봉은 오랜 벗인 박정효와 함께 사곡역 유치운동이라는 근대식 주민운동, 주민자치운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셈이다. 사곡역 유치운동이 마무리되는 1965년 말부터 이팔봉은 한전 대구지사로 여러 차례 연락하여 사곡동과 광평동 일대에 220볼트 전기를 유치하였다. 220볼트라야 가을 벼타작을 원활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미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초이지만 읍내 일원에 국한되었고, 그것도 가로등이 중심용도였으니 가정집의 전기 사용은 손꼽히는 부잣집 아니면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하였다. 그런 사곡동과 광평동에 이팔봉은 처음으로 전기를 유치한 것이다. 나는 우리집에 전기 들어온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면서부터 호롱불과 촛불만으로 지내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전기가 들어와서 온 집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밝음이란 마치 천지개벽을 보는듯한 황홀경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구미공단 부지의 조성이 본격화되고 마침내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대전 대구 구간이 완공되었다. 이로부터 구미시로 경북의 모든 군단위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지금은 말그대로 "8도공화국"이 되었다. 공단부지가 완성되고, 뒤를 이어 도시바, 코오롱, 금성사, 선산섬유, 윤성방직, 제일모직에 이르는 크고 작은 기업들이 앞다투어 입주하면서부터 마을 사람들의 형편이 점차 좋아지게 되더니, 집집마다 전기밥솥, 전기 곤로, 세탁기, 냉장고, TV가 경쟁하듯 차례로 구입되었다.
세계속의 구미는 이렇게 1970년대 초입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