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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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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창랑 장택상 선생이 일생을 기울여 수집한 예술품들이 금오산에서 전시된 데 이어 올해 3월 그의 자서전이 재출간 되어 지역 사회에 배포되었다. 근현대 역사이든 정치이든 모조리 박정희 전 대통령에서 시작되어 박정희로 끝나는 경상북도의 구미시에서 창랑 장택상이 마침내 거론된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새롭다.
창랑의 자서전―“대한민국 건국과 나”에 언급된 인물들은 대부분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주역들이다. 뿐만 아니라 창랑은 훌륭한 후배들을 정치에 입문시키고 성장을 도왔는데 대표적으로 김영삼, 김대중, 신현확 (申鉉碻, 1920~2007)이 있다. 김영삼은 창랑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김대중은 1958년 창랑의 주선으로 정당의 대변인에 발탁되었고, 이웃 마을 출신의 신현확은 1963년 장택상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뒷날 김영삼,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신현확은 국무총리를 거쳐 TK(대구, 경북)의 대부가 되었다.
창랑 연보에 따르면 그의 자서전은 “사실의 전부를 말한다”는 제목으로 1965년 집필을 완료하였다. 그럼에도 창랑의 자서전은 1992년 비로소 출판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30여 년이 흘러 이번에 재출간되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집필된 자서전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는 군사독재가 무너진 1992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서 비로소 발간되었고, 이번 재출간의 과정을 거쳐서야 마침내 그의 고향인 구미시에 소개된 것이다.
창랑의 저서전에 김영삼 대통령은 존경의 마음을 절절히 담은 추모의 글을 올렸고, 김영삼 회고록 1권에 창랑이 파리에 있을 때, 중국의 지도자 주은래(周恩來, 1898~1976)와 같은 하숙집에 살면서 극장에도 같이 다니는 등 친하게 지냈으며, 주은래를 "대단한 인물"이라 평했다는 매우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주은래 평전을 보니 그는 1920년 12월 13일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였고, 1921년 10월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창랑 또한 1921년 봄에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니 두 사람이 교류한 시기는 불과 몇 개월의 짧은 기간이었다. 아시아의 두 수재가 이역만리 프랑스에서 만나 극장에 같이 갈 정도로 친했으니 여러 일화(逸話)들이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으니 못내 아쉬울 뿐이다.
창랑의 자서전에는 그의 유학 시절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다. 창랑은 1912부터 1921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스위스를 오가며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에딘버러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에든버러 대학교는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소재한 종합대학이다. 1583년에 개교해 500년 가까운 역사를 보유한 영미권에서 여섯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창랑이 1912년 봄에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시절을 거치면서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20세기 초에 이르러 정치와 경제, 과학 기술에서 세계 최고의 선진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대항해 시절부터 아프리카와 중남미는 일찍부터 유럽의 식민지로 지배하였다.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에 들어서자 인도,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버어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이 유럽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한 일본은 1895년 대만을 삼켰고 1910년 힘겹게 버티던 조선마저 식민지로 병탄(倂呑)하였다, 반면 중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에 의해 아시아의 병자(病者)로 조롱받는 초라한 신세가 되어 사실상의 식민지로 추락하였다.
창랑이 런던에 도착했을 때 마침 영국에서는 광부와 철도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수도 런던에까지 파업의 여파에 휘말려 결국 정치의 최대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집권당은 지금은 위력을 상실한 자유당이었다. 영국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스페인에서도 대규모 노동자들의 파업시위에 이어 불만에 찬 농민들은 곳곳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의 폭발적 진출에 발맞추어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원하면서 격렬하게 혁명을 선동하고 있었다. 레닌(1870~1924), 스탈린(1879~1953), 트로츠키(1879~1940),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가 이 시기의 주요 혁명가들이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1914년 유럽의 “백년 평화”가 깨어지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며 시작되었고,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창랑은 제1차 세계대전의 모든 과정을 영국과 프랑스에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으로 확인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고비에 접어든 1917년 창랑은 유럽에서 러시아 대혁명을 맞이하였다. 1917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비보르크의 방직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전제 타도', '빵을 달라', '전쟁 반대'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을 시작했고 10일에는 페트로그라드 전 도시에서 총파업이 발생해서 군경과 시위대의 충격이 본격화되었다. 마침내 11월 노동자와 농민, 병사들의 손으로 러시아의 전제정치가 무너졌다.
1917년 11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이 구미시 상모동에서 출생하였다.
1917년 11월 26일 창랑의 부친 장승원(張承遠, 1853~1917)이 대한광복단원들에게 총을 맞았고 이틀 후인 11월 28일 사망하였다.
창랑은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결집하여 프랑스 파리와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설치한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였다. 이때부터 창랑은 이승만, 유석 조병옥(趙炳玉, 1894~1960),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1956)와 교류하였다.
이들 외에도 창랑은 일제강점기부터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김준연(金俊淵, 1895~1971), 조봉암(曺奉岩, 1898~1959)에 이르는 좌우를 넘나드는 폭넓은 교우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창랑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사형선고를 받자 창랑은 그를 구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지만 끝내 죽산(竹山)은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고 말았다. 조봉임 구명운동은 자서전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창랑의 정치 역정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하다. 그는 해방 직후의 격렬한 좌우투쟁, 미국이 주도하는 군정과 미소공동위원회의 간섭, 한국전쟁,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두루 경험하였다. 그에 더하여 미국과 소련이 동서 두 진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강고한 진영대결이 고착(固着)되는 시기에 정치를 하였으니 고비 고비마다 파란이 오죽하겠는가.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경기도 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을 역임하면서 조선공산당원과 남로당 진압을 주도하였고, 해방정국에서 10차례나 테러를 당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1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제5차·6차 UN총회의 대표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52년 5~7월 무렵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범석 등과 함께 부산정치파동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고,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그 뒤 부통령 후보로도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4·19 혁명으로 장면 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야당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자유당을 재건하여 총재가 되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중에 1961년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일부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일선에서 활동하였으니, 1961년 이후 창랑의 만년은 모진 탄압이 몰아치는 굴욕의 나날이었다. 1964년 이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윤보선, 장준하, 함석헌 등과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을 역임하고, 1969년 신민당 고문이 되었다.
자서전에는 정당사회단체 대표로 신민당 당수 유진오(兪鎭午, 1906~1987) 선생이 1969년 8월 7일 발표한 추모사가 들어 있다. 추모사에서 유진오는 《조국의 광복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평생을 바치신 선생》으로 창랑의 생애를 요약하였다. 자서전에 수록된 창랑 선생이 정치활동의 과정에 발표한 연설문과 평론, 어록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옮기면서 창랑 장택상 선생의 소개를 마치게 되었다. 지면의 제한이 무척이나 아쉽다.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952년 5월 “비상계엄 해제‘에 대한 글의 일부를 옮겨 적는다.
1948부터 2024년 12월 3일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모두 18 번에 이르는 비상계엄이 있었고, 그 중 10 번은 이승만 정부 시절에 발동되었다.
비상계엄에 관한 건(1952년 5월)
―계엄이라는 것은 대개 경찰로서는 치안이 유지 안 되는 도시에, 혹은 폭동이 일어나는 되시에만 그것이 필요한 것이지, 한국 전체에 하등의 폭동이 없고, 경찰의 힘을 가지고서도 당연히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엄법을 실시해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국회에서까지 말썽을 일으키는 그것은 당연히 해제하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주권행사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권을 잡은 자가 실정(失政)을 하거나, 또는 그에게 권태감을 느낄 때는 한 번 갈아치우는 것이 관례가 되어 가지고 있고, 또 이것이 현대 국가에서만 관례가 아니라 고대 희랍과 로마에서는 실행해 왔던 것이다.(중략) 곧 13세기에서부터 현대까지 갖은 만관과 장애를 극복하여 가면서 여러 나라 민족들이 민주 발전을 위해서 바친 많은 희생의 결정체가 즉 오늘 날의 성과를 이룬 것이다.(이하 생략)
박정희 대통령을 향한 진정서(1969년 5월)
초하지절(初夏之節)!
각하의 건승하심을 축복합니다. 각설, 소생은 금년 1월경에 신병으로 의사의 권유에 의하여 미국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로 결심하고 외무부로부터 회수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에 가서 치료를 마치고 금월 초에 귀국한즉, 의외에도 비행장에서 여권을 압수당하고 1주 후에 다시 외무부에 가서 압수된 여권의 반환을 요구하였더니, 외무부 측은 본인의 여권은 취소되었으니 반환할 수 없다고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이하 생략)
이에 대하여 1989년 7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비서를 보내 선생을 위문하고, 창랑 선생으로 시작되는 쾌유를 비는 친서를 전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