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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암 장지연 선생(사진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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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장지연은 1901년부터 본격적으로 황성신문의 주필 겸 사장을 맡았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경남일보의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1914년 매일신보에 730여 편에 이르는 글을 남겼다. 이러한 근대 신문에서의 활동으로 장지연은 근대 언론인의 선구자로 근대 신문의 태두(泰斗)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의 주필로서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집필하여 하루 사이에 전국에 걸쳐 모든 국민의 마음을 진동시켰다. 이 논설은 독립운동가들이 이역만리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유럽에서 풍찬노숙의 고된 삶을 이어가면서도 암송할 정도로 명문(名文)이었으며, 오랫동안 20세기 최고의 논설로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위암 장지연은 1864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상주목 내동면 동곽리(지금의 상주시 인봉동 · 성동동 근처)에서 아버지 장용상(張龍相, 1839~1887)과 어머니 문화류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죽은 남동생이 있었으나 어머님을 일찍 여인 탓에 위암은 일생 혈혈단신이었다.
장지연은 1877년부터 1906년까지 약 30년을 구미에서 살았다. 1877년 여름 공부를 위해 칠곡군 북삼면 율리(栗里)의 외가를 방문하였고, 같은 해 겨울 공부를 위해 오태 마을을 방문하였다가 집안의 어른인 오하(梧下) 장석봉(張錫鳳, 1820~1882)의 눈에 들어 첫 스승으로 모시면서 그길로 구미에서 생활하였다.
1882년 오하 공이 돌아가시자 임은 마을의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에게서 고문(古文)을 배웠다. 허훈은 13도 창의대진소를 이끈 유명한 의병장 왕산(旺山)의 장형(長兄)으로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으로부터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으로 이어지는 실학 학통을 계승한 당대 영남을 대표하는 뛰어난 유학자였다. 어릴 때부터 천재(天才)로 이름을 떨쳤던 장지연은 훌륭한 스승들의 지도(指導)를 받으면서 학문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고, 특히 17~8세의 소년 시절부터 역사와 문장, 시문(詩文)으로 영남 전역에 이름을 떨쳤다.
1894년 사방에서 동학 농민들의 저항이 시작되고 이로 인해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직면하게 되었고, 특히 경기도 양주에 거주하는 개화 인사 해위(海偉) 강흥수(姜興秀, 생몰년 미상)와 동학 농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상감영에 파견된 중군(中軍) 금사(錦士) 박항래(朴恒來, 1853~1933) 등과 교류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통감하기에 이르러 조선을 향해 사면에서 몰아치고 있는 근대의 새 바람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다.
1897년 서울로 상경하여 내부 주사로 중앙정부에서 활동하였고, 독립협회와 황성신문의 발간에 발기인이 되었다. 황성신문은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의 독립신문이 정간되기 1년 전인 1898년 기독교적 담론(談論)보다는 유교 전통에 입각하여 근대적 개혁에 대해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하려는 장지연을 비롯하여 남궁억(南宮檍, 1863~1939), 나수연(羅壽淵),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유근(柳瑾, 1861~1921), 신채호(申采浩, 1880~1936)에 이르는 독립협회 중도파가 국한문 혼용으로 창간하였다.
황성신문 주필 겸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장지연은 언론인으로서 독보적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가 다수의 역사 서적을 편찬하여 민족사 서술의 기초를 개척하였다. 특히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증보하여 편찬한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의 부록을 통하여 장지연은 자신만의 확고한 민족주의 역사관을 여실하게 드러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을 비롯한 언론 활동의 전반에 걸쳐 당대 최일류 경제학자의 시각으로 식산흥업(殖産興業)을 통하여 농업, 상업, 공업을 일으키자는 논설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근대 과학에 대한 다양한 정보의 제공에 주력하였고, 근대화에 대한 주장을 전국에 전파하였다. 이처럼 장지연은 유학자이면서도 “집단적 각성”으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인 경북 최초의 근대인(近代人)이었으며. 대한제국의 문명개화를 촉진하는데 일생을 기울인 근대화의 선구적인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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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길 시니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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