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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절 구미시 전경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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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의 역사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선택을 주문 한다. 이래서 암흑기를 살아온 이들은 현실순응이냐, 현식극복이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깊은 고민을 하게된다. 36년동안의 일제강점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 당시 어떤 이들은 암흑 속에서 길을 내는 삶의 방식을 택했고, 또 다른 이들은 암흑 속에 둥지를 트는 적자생존의 방식을 택했다.
오늘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바로 목숨을 담보한 독립투사들에 의해 개척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때 과거를 올바르게 조명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 해방 직후 몰아닥친 다사다난한 이땅의 암흑은 진실과 사실을 굴절시키며 종종 외도의 길을 가곤했다. 그래서 어깨에 짊어진 책임과 의무는 더욱 무겁기만 하다.
예외 없이 구미를 거쳐 간 일제 강점기.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굴욕과 수치의 그 기간 동안 수많은 구미출신 인사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일제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인사는 이념논리로 재단되면서 본질을 심하게 훼손당해야 했고, 일부 인사는 역사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망각되는 비운의 세월 속에 묻혀야 했다.
구미는 3.1독립운동의 중심지 중의 하나다. 일제 압제에 항거한 구미출신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다.
왕산 허위, 장진홍, 김정술, 박희광 선생의 그 중심에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일제 시절 어떤 활동을 했는가<편집자 주>
■왕산 허위 선생
- 의병을 일으킨 애국정신, 서울에도 왕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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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산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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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가 낳은 독립운동가인 임오동 출신 왕산 허위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왕산기념관>이 2008년 12월 완공됐다. 이 기념관은 1만6320평의 부지에 연면적 600평 1동으로 40억 원을 들여 건립됐다.
구미시 임은동 출신 왕산 허위선생은 1854년 철종 5년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1896년 3월 23일부터 의병활동을 시작해 김해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 독립운동에 나섰으나 첫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했다.
1899년부터 1904년까지 평리원의 수석판사를 역임하면서 근대 지향의 혁신유림으로 탈바꿈했다.이 당시 왕산은 10개조 개혁안을 만들었는데, 학교설치, 화폐제도 개혁, 신분제 폐지, 세제정비 등이 관심을 모았으나, 개혁안이 문제가 돼 관직에서 물러났다.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 적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규모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왕산은 원주에서 활동 중인 이인영과 협의 ,13도 의병을 통합해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키로 했다. 이를 계기로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의병 약 1만 명이 집결한 가운데 13도 차의 대진소가 결성되었고, 왕산이 군사장을 맡았다.
이인영이 부친의 별세로 귀향하자 총대장을 맡은 왕산은 동대문을 향해 진격했으나, 패했다. 현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은 당시 연합의병부대의 의병활동을 기념해 왕산의 호를 따 명명한 왕산로가 있다.서울 진공작전에 실패한 왕산은 임진강으로 이동, 의병활동을 계속했다.당시 임진강 일대는 허위의병부대의 군정이 실시될 정도로 기세를 떨쳤다.
1908년 6월 일제에 체포되었고, 9월 27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공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장진홍 선생
- 폭탄제조, 일제 심장 폭파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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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진홍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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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옥계동 문림리에서 출생했다.1·914년 3월 조선 보병대에 입대 2년 후인 1916년 제대했다.
이어 곧바로 조국 고아복 투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당시 비밀 독립운동단체였던 광복단에 가입했다.1918년 7월, 광복단 동지인 이내성의 소개로 만주 봉천성에서 김정묵과 이국필을 만나 독립운동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러시아 영토인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교포 청년 80여명을 모집, 군사교육을 실시했다.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3.1운동이 발발했다. 부친의 논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만행을 인천항에 들어온 미국군함 승무원에 의뢰, 세계 각국에 배부할 것을 의뢰했다.1926년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을 논의했고, 1827년 만주에서 몰래 들여온 다이나마이트 뇌관과 도화선, 50원의 자금을 받고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27년 8월 폭탄 2개를 시험용으로 제작, 칠곡과 선산 경계에 있는 봉화산에서 성능실험을 하고 1927년 10월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1개를 제조,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신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고 했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경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후 포장을 해 여관 종업원인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4개 처에 송달을 부탁했다.같은 날 오전 11시 50분경 폭발,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은행창문 70여 짝이 부서졌다.
장 의사는 이후 선산군 해평면으로 피신하여 안동과 영천에서 재차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1929년 2월 13일 체포된 그는 조선인 경관들에게 “조선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이후 반년 만에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1930년 그는 11시경 자결했다. 정부는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정술 선생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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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술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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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원평동 324번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와 맞섰던 독립투사 김정술(1909-1964년)선생은 우리 후손들이 그 업적을 높이 기려야 할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간 동안 최대 독립운동단체로 맹활약을 한 신간회와 최대 사건 중의 하나인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과 밀접한 교감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앞장 선 김정술 선생이 아직도 독립운동가로서 역사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무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가슴을 더 쓰리게 하는 것은 독립투사로서의 길을 걸어온 남편의 삶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부인 최복인 여사가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김정술>이라는 역사적인 평가를 접하지 못하고, 지난 2005년 남편의 곁으로 돌아갔으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서럽다고해서 묻힌 역사를 방관할 수 마는 없는 일이다. 김 선생의 아들인 김일식(1940년생), 김구식(1950년생) 씨와 딸 김경화(1956년생) 씨 등은 오늘도 과거 속에 묻힌 아버지의 독립투혼을 세상으로 이끌어올리기 위해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더 이상 세상이 이들의 외로운 투혼을 외면해선 안될 일이다.
김정술 선생은<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을 주도한 칠곡 인동(지금의 구미시 인동동)의 장진홍 선생(1895-1930년)과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총무였던 구미출신 박상희 선생(1906-1946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1909년 생인 김정술 선생은 1909년생인 박상희 선생의 고향후배이면서 동시에 구미공립보통학교 (지금의 구미초교)2회로서 12회인 박정희 대통령의 10년 선배였다.특히 당시 구미독립운동사의 중심에 서 있던 박상희 선생과 신간회 활동을 함께 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시 김선생이 관여했던 신간회의 성격은 무엇이었으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신간회는 1927년 2월15일 사회주의, 비타협적 민주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좌우합작의 거대 독립운동단체였다. 1931년5월까지 4년여 동안 일제와 맞선 이 단체는 전국은 물론 해외에 지부에 3-4만명의 회원를 거느릴 만큼 거대 조직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신간회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쟁취와 동양척식주식 회사 반대, 근검절약 운동, 파벌-족벌주의 타파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아 일제와 맞섰다.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은 장진홍 선생의 주도로 1927년 10월16일 거사용 폭탄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제조해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민족운동이었다. 은행간부에게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으나, 폭탄속의 뇌관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순사4명과 은행사환, 행인1명등 6명이 다쳤다.
선물상자로 위장, 심부름꾼을 시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된 당시의 폭탄은 1927년 10월 16일 장진홍 선생이 칠곡의 집에서 제조한 것이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경상북도지사와 경상북도 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하기까지는 무수한 우여곡절이 뒤따랐다. 특히 금오산 근교의 깊은 산 속에서는 폭풍우치는 한밤 중을 이용해 무수한 실험을 거쳐야 했다.
이 당시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고등보통학교(대구고보/ 현 경북중고교)에 입학하면서 1927년 2월15일 발족한 신간회에 몸을 담은 김 정술 선생은 열차를 이용해 구미-대구를 오르내리면서 폭탄실험에 필요한 폭약류를 책가방 속에 넣고 운반했다. 결국 학생신분인 김정술 선생의 책가방 속에 숨겨 운반된 폭약은 금오산 깊은 산속에서 폭탄제조를 위한 실험에 쓰였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위한 폭탄제조의 원료로 쓰였던 것이다.
장진홍 선생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친척을 통해 안동의 주요 시설을 폭파할 수 있도록 폭탄을 제조해 전달한데 이어 친구를 통해 영천 거사를 위한 폭탄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면서 일본경찰은 장진홍 선생을 비롯한 가담자를 체포하기 위해 구미지역 인근을 벌집쑤셔 놓듯 했다.
당시 경북 경찰부 요주의 인물로 주목된 김정술 선생에게도 수사망은 좁혀들기 시작했다.결국 1927년 11월10일 경북 경찰부 고등과 사상범 전담요원인 최석현 경부보와 형사 3명은 대구에서 구미로 올라와 신간회 산하 구산 구락부원인 김정술 등 2명을 검거하고, 대구로 압송한 후 대구시 유치장에서 취조를 하기 시작했다.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은 조선일보 11월 14일자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경북 경찰부원이 돌연 신간회원 검거-불안에 쌓인 구미일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는 "경북경찰부 고등과에서는 돌연히 긴장한 중에 최석현, 경부보는 형사 3명을 데리고, 구미까지 가서 신간회 선산지부 총무 박상희, 구산 구락부원 윤재우, 김정술씨를 검거한 후에 신간지회 사무실과 3씨의 집을 수색한 후에 지난 10일(1927년 11월10일)오후 3시경 대구로 압송하여 유치장에다가 유치했다. 방금 극비리에 취조하는 중인 바 모처로부터 탐문한 바에 의하면 방금 구미에서는 조금만 수상한 사람이 지나가면 즉시 불문곡직하고 검속함으로 인하여 현재 구미사람들은 매우 공포에 쌓여 있는 모양이더라"
1927년 당시 조선일보가 보도한 기사를 보면 계엄하에서 미수에 그친 폭탄 사건 계획이 얼마나 구미 전역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는지를 직감할 수 있다. 특히 그 중심에 신간회 소속의 박상희 선생과 김정술 선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구금된 김정술 선생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의 연루관계를 취조한 것은 해방 후 인동읍장을 지낸 선산경찰서 윤갑덕 형사였다. 가족에 따르면 남편 김정술 선생을 떠나보낸 후인 70년대 초반, 부인인 최복인 여사는 윤갑덕 형사를 만나 조선은행 폭탄 사건 당시 김정술 선생을 취조했다는 자술서를 확보했으나, 자술서는 훗날 장씨 집안으로 넘겨진 후 분실되고 말았다. 44년부터 50년까지 6년동안 구미초교 교사를 지낸 최복인 여사의 애타는 심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케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문과 석방, 그리고 일본으로>
나이어린 학생신분으로 유치장에 감금된 김정술 선생은 새벽 2-3시경 고문실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을 먹이는가하면 책상위에 손을 묶어놓고 대나무 침으로 손톱 밑을 찌르는 죽음의 고문은 수개월째 지속됐다.
다행스럽게도 김정술 선생이 석방된 것은 서장실을 방문한 대구고보 교장의 특별 탄원과 보증 덕분이었다. "새벽에 교장선생님은 댁까지 데려다가 목욕물을 데워주고, 새옷을 입으라고 건네주셨다"고 회고할 만큼 김선생에게 대구고보 교장은 생명의 은인이기까지 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 여파의 악몽을 딛고 대구고보를 졸업한 것은 1928년 3월이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법정대학과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인 1929년 일본으로 도피한 장진홍 선생은 그 곳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지 1년 후인 1930년 7월31일 자결하게 된다.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김정술 선생을 따라다닌 것은 독립운동 전력이었고, 이 전력은 사회진출을 가로막았다. 이래서 택한 곳이 바로 독립운동가가 집결하고 있던 만주였고, 독립을 위해서는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길 뿐이라는 일념으로 길림성 용정에 있는 영신(광명)중학교에서 인재양성에 몰두했다. 당시 김정술 선생이 가르친 제자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 이주일 전 감사원장, 윤태일 전 서울시장, 김동하 전 해병대 사령관, 이종갑씨 등이었다.
1927년 모진 고문의 악몽을 딛고 해방을 맞이하기까지는 18년 세월이 흐른 후 였다. 해방과 함께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김정술 선생은 후학을 양성하는 길에 전념했다. 경기상업, 수도여고, 용산고 등을 오가면서 수학과 영어, 체육을 가르치는데 전념한 김선생은 그러나 지병과 싸워야 했다. 어린나이에 수개월째 고문으로 망가진 심신이 지병을 앞세우고 선생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1949년 고향인 구미로 돌아온 김 선생은 지병이 호전된 1960년 선산토지 개량조합장으로 재직하다가 1964년 5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선생을 둘러싼 주변세상은 냉정하기까지 했다. 선산토지 개량조합장을 탐낸 일부 인사들이 있지도 않은 비리를 날조해 투서를 해대기 시작하면서 선생을 괴롭혔던 것이다. 끝내 도지사실로 불려가 퇴임을 종용받고 돌아온 선생의 억울함을 전해들은 최복인 여사는 서울에 있는 선생의 제자들을 찾아 눈시울을 붉혔고, 제자들 역시 선생의 억울함을 바로 잡아드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시간은 이미 선생 편에 있지 않았다.
최복인 여사가 머나먼 길을 오르내려 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김정술 선생은 세상밖으로 발길을 내딛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 제자들은 선생에게 대한체육회장직을 맡아 줄 것을 종용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은 극구 사양했다. 고향을 위해 마지막 봉사하는 길이 최선의 길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박희광 선생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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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휘광 선생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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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봉곡동에서 태어난 박희광 선생은 1908년 8세때 부친을 따라 만주로 들어가 1916년 3월, 청원현 남성자 학교를 졸업한 후인 18대 때, 일제를 토벌하기 위해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지휘하는 독립 군사단체인 통의부 5중대에 자진 입대했다. 이어 6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마친 후 특공대원으로 편입,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박희광 선생은 특히 김명봉,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일본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이들 특공대원들이 가장 먼저 겨냥한 대상인물은 남만주 일대에서 악명 높았던 일제의 앞잡이 최정규와 일제의 첩자 정갑주였다. 결국 1924년 6월 1일, 정갑주와 가족을 몰살했고, 이어 1964년6월 7일에는 최정규의 집안을 초토화시켰다.
이어 1924년 7월 22일에는 봉천의 일본 총영사관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했다. 이에앞서 박희광 선생 등은 이등방문의 수양녀를 대련에서 암살하려고 했고,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봉천에서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희광 선생 등은 1924년 7월 22일,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한 그날 저녁 일본의 고급 요정인 금정관에 들러 군자금 3백원을 징수해 나오다가 일경에 발각돼 총격전으을 벌였고, 이 와중에 김광추 소대장은 순국했다. 또 박희광 선생은 권총으로 응사하면서 맞섰으나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투사다운 기백을 보인 박 선생은 관동청 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상고해 고등법원 2심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중국 뤼순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박희광 선생이 출옥한 것은 20년간의 옥고를 치룬 1943년 3월 23일, 그의 나이 43세였다, 결국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옥중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것이다.박 의사는 출옥 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대련에서 동지들과 함께 중경으로 이동한 후 임시정부를 찾아 독립 투쟁을 하려고 했으나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4년 귀향해 그해 4월 20일 결혼한 박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임시 정부 요원들이 귀국하자, 백범 김구를 만나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했다. 당시 김구는 비서를 시켜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박 선생의 생활은 궁핍했다.옥중에서 익힌 양복 제봉 기술에 의지해 어렵게 살다가 5남매를 남겨둔 채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풍상과 맞서 사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은 것은 광복 후 23년만인 1968년 3월1일이었다. 기쁨도 오래 가지 않았다. 박선생은 7년 후인 1970년 1월 22일 70세를 일기로 서울 보훈 병원에서 한많은 생을 마쳤고,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부인 류씨와 함께 안장됐다.
그가 세상을 뜬 2년 후인 1972년 3월에는 공적을 기리는 동상(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됐다. 이어 1973년 3월 1일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친필휘호와 하사금을 받으면서 동상건립이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여의치 못한 자금사정으로 결국 1984년 3월 1일 당초 흉상을 동상으로 재주조 변경해 건립키로 하고, 1984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지금의 백운교 옆에서 기공식을 가졌다.이어 1984년 9월 정부로부터 동상건립 심의 84-1호로 지정받아 1984년 12월 28일 제막식을 갖게 됐다.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명예 회장 이수성, 사무처장/유족대표 박정용)가 추진하고 있는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고향옛터 생가 복원과 추모관 및 겨레(애국)의 동산 조성 사업>도 시비 미 확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생가를 고전적 한옥 황토집1동과 팔각정 1동으로 복원하고, 유물 전시실을 포함한 추모관 1동과 겨레(애국) 동산 등이 들어서게 되는 사업에 필요한 예산은 21억4천5백만원이다. .
사업회는 이를 위해 친지와 유족이 이미 확보한 4천5백만원에다 추가로 21억원을 조성하기 위해 국비 7억원, 시비 7억원, 도비 7억원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이에 앞서 밀양박씨 경주공파 종중은 2천58평방미터(622평/ 18억6천6백만원 상당)의 대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사업회가 국비를 확보했지만 시비 미 확보로 사업이 무산되기에 이르렀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단하셔요
06/13 10:36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