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남 상주삼삼원예영농조합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은 구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상주의 함창읍이었다. 이날은 제18호 태풍 비탁이 북상하고 있다는 2일이다보니 가는 길에 비가 많이 내렸다. 추수를 앞두고 내리는 비는 농사에는 좋지 않다고 한다. 가을걷이가 문제 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서... 몇 번의 길을 돌아, 김인남 대표를 그의 일터인 ‘한운농장’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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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게 악수를 하면서 그는 안타까운 얘기를 먼저 했다. 그는 오이 농사를 약 2천여 평의 비닐하우스에서 짓고 있었는데, 그만 1천여 평 가까운 비닐하우스에서 화재가 났다고 한다. 그는 비닐하우스 화재로 인한 재산 피해보다 그동안 농사를 지으며 얻은 그의 산지식이 그대로 녹아있는 컴퓨터와 하드가 화재로 손상된 것이 더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농사를 짓는 운이 좋았다”며 농사를 짓게 된 1981년경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본인이 태어난 곳은 강원도 태백이라고 했다. 그의 부모님께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김인남 대표를 이사와 함께 함창으로 나오게 된 것이 이곳 함창이 고향이 되었다고 한다. “1981년, 저는 결혼 후 서울로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부모님 문제와 친구들이 붙잡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농사를 짓게 된 이유는 서울대 농화학과를 나오시고 가까운 점촌에서 농약방을 하신 분을 만나게 되면서다”며 지난날을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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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농업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농업도 직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직업이라는 것은 소득이 안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농업은 통상 경험만으로 짓고 있는데, 농업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식과 정보를 갖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자기가 도와 줄 테니 함께 농사를 짓고 이 땅을 지켜 보자”는 그의 권유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고 했다. “그분의 친구들 즉, 서울대를 나오신 분들이, 한농이나 흥농종묘 같은 종묘회사나 제약회사의 인맥들이 저와 연결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제가 농사를 짓다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고 이론이나 과학적인 농사 방법들을 전달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김인남 대표의 귀한 복이었다. 또 결혼을 한 몸이다 보니 먹고 살기 위해 가장 환전하기 좋은 채소 농사로 농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인연이 된 분들에게서 과학적이고 선진 농업을 전수받았는데 그것을 실천하려다보니 농자재가 너무 부족했다. 그 농자재 부족을 사람의 힘으로 때우려다보니 고생을 많이 했다. 육묘도 그렇고 또 비닐하우스로 농사를 짓는데 요즘 같은 다기능성 비닐이 없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 짚꺼치를 몇 겹으로 덮기도 하고 촛불까지 켜놓기도 하는 등 힘이 많이 들었다. 그분들의 이론을 농자재가 부족하여 온몸으로 버틴 꼴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 정보나 지식들을 잊을 수 있겠냐?”면서 웃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재도 많고 정보도 많다보니 혹, 젊은 분들이나 귀농하시는 분들 중에 한방을 찾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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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도부터 연동하우스 즉, 일본으로 수출하는 오이 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일본의 수입업자 중 대학교수 직을 은퇴한 분을 만났다. 그렇게 일본 연수를 가서 “품질이나 생산, 유통 관리를 살펴보니 우리 농사가 정말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농사를 짓는 방법이나 상품을 연구하는 것 등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일본에서는 진행하고 있었다”며 비근한 예를 상주오이의 출하 장면에서 말해준다. “이곳 상주 오이의 출하는 비닐 봉지에 100개씩 오이를 담아 농협 등에서 현지 판매를 했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이 오이를 사가서 도회지 등에서 위탁 판매를 하고 남은 것을 서울 가락동 시장으로 넘기는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직접 가락동 시장으로 현지 조사를 나가보니 “(가락동)상인들이 상주 오이는 품질이 우수한데 왜 이런 가격에 내놓는지 이해가 되질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우리에게 했다.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박스에 오이를 담아 경매시장으로 바로 나갔다. 상주 원협의 수수료와 가락동 시장의 수수료를 물고 판매차량에 실어 올려 보낸 것이다. 그런데 수수료를 떼고도 약 30%이상 당시 하고 있던 현지 판매보다 수익이 올라갔다고 했다. “상주농협 등에 가서 이야기를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공검, 함창, 이안면의 30여 젊은 농가와 함께 나와 법인을 조직했다. 그것이 바로 삼삼원예영농조합이다. 그 삼삼의 첫 번째 삼은 공검, 함창, 이안면의 삼이고 두 번째 삼은 최대의 노력과 최선의 선별 최고의 품질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현재 삼삼원예법인의 경우 공검면이 나가고, 이안면과 함창읍의 45 농가가 법인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1997년 이스라엘의 초청을 받아 이스라엘의 농업을 견학 간적이 있다. 지하 1천m 이상의 지하, 소위 뜨뜻한(온천수) 물을 퍼 올려 농업용수로 사용하며 한방울의 물이라도 절약하는 정신이 놀라울 정도였다. 한 작은 키부츠를 방문했는데 한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상주를 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원예 산업과 식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상주를 들렀었다고 한다. 그의 키부츠에서는 2년을 근무하면 두 달 간의 휴가를 준다고 했다. 그 두 달간 키부츠를 위한 논문이나 발전 안을 제출하면 또 다른 인센티브가 있다고 말했다. 실로 충격이었다. 우리는 우물안의 개구리구나 하는 충격을 받았다. 농사도 그냥 지을게 아니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농업도 직업이고 직업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야간대학을 등록했다. “그동안의 지식은 천으로 말하면 조각천이었다. 그것으로 옷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지식이 아니라 체계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바로 “농업과 교육을 연결 시킨 첫 번째 이유였다”고 그는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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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스스로 마이스터가 되고 피교육자에서 교육자로 변했다고 했다. “한 이웃군 출신의 장관이 제게 자기의 밑천인 노하우는 조금 남겨두고 가르쳐 주는데 왜 이렇게 노하우까지 탈탈 털어서 교육을 하느냐''며 웃으며 묻길래 ”저는 현장교육을 하다보니 그렇게 된다. 그리고 제가 처음 배운 분들이 존재함으로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제가 갖고 있는 작은 지식이 도움이 될까 싶어 교육현장에서 다 말한다“고 웃는다.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내 주고 또 자기는 새로운 종묘나 작물에 도전하는 동업자 정신의 발로라는 생각을 해본다. “제 교육은 SNS상에서 잠깐 공지를 하는데 그 이유는 15명 내외가 교육하는데 부담없고 딱 맞다”고 말한다.
그는 가장 힘주어 말하는 것은 바로 “종자의 특성을 제대로 배우고 학습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농부들이 자기 방식으로만 농사를 지어보고 안되면 종자에 대해 원망한다”고 말했다. 근시안적인 방법론에만 너무 매달린다는 것이다. 기초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머리가 너무 좋아 농사를 짓기 힘든다”고 일본의 오이 수입업자가 한 말이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에게 하나를 가르켜 주면 열을 말한다”고 말했다. 하나하나가 중요한데 그 과정을 건너뛰는 것이 문제였다. 기초가 중요한데, 오이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토양과 종자 등 모든 것이 중요한데 그 부분을 너무 소홀히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농사를 짓는 작물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찌 식물과 말을 나눌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을 잘 알면 싹이 텃을 때, 열매를 맺을 때, 그 식물의 색상과 성징을 보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오이 농사에 생 짚을 넣는다고 했다. “오이농사는 특성상 일년의 대부분 땅과 씨름한다. 10월에 씨를 뿌리면 11월부터 수확에 들어가 그것이 해를 넘기고 계속된다. 그러면 아무리 비료나 농약을 작게 쓴다 해도 토양에는 그러한 성분이 쌓인다. 그러한 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 볏짚이었다. 볏짚이 썩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비료가 주는 영양분이다. 볏짚은 스스로 먼저 비료를 받아들이고 나중에 볏짚이 썩어 오이가 자라기 위한 토양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는 오이 마이스터가 되었다. “전국 마이스터 대학을 나오지 않는 사람 중에는 제가 유일한 마이스터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문분야에 대한 평가는 낮고 시험과목에 품질관리 농업법령 등이 들어갔다”면서 전문적 지식, 실전 지식이 좀 더 많이 평가될 수 있는 마이스터의 기준이 되었으면 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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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생명산업이다. 순리를 지켜야 한다. 내 욕심에 억지를 부리면 안된다. 작물에게 내가 주인이다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모든 작물의 주인은 생명 그자체이다. 그 생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서 보조를 해주는 것이 바로 농부이자 농업이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운영하는 농장의 이름은 한운농장이다. 한가할 한(閑)자에 구름 운(雲)자를 쓴다했다. 농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끈기를 갖고 여유 있게 농업에 임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직업 농사라는 이야기다. 농사는 비즈니스이며 농업이 직업이라 말한다. 그래서 끊임없는 학습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오이’에 스스로의 청춘과 인생을 바쳤다고 할 수 있는 김인남 대표. 그의 오이 생육에 대한 산지식을 후배 농부들이 함께 하길 바란다.
오이만을 생각하며 욕심 없이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김인남 농부의 일상이 부러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