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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구미공단 조성 50주년을 맞았다. 구미공단의 공식 명칭은 ‘구미국가산업단지’다. 구미시는 공단조성 반세기를 기념하기 위해 1969년 9월 16일 공업단지 조성 실시 계획 인가일에 맞춰 지난 9월 16일부터 22일까지를 구미공단 5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기념식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또 수출 10억불을 돌파한 후 수출도시임을 상징하는 수출산업의 탑(구미시 광평동 일원, 1976년 건립) 앞에 50주년을 기념하는 선언문비를 제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기념행사를 진행하면서 홍보영상이나 화보집, 선언문비에 구미산단 조성을 지시하고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빠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지역민들은 대부분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짙다. 박정희 대통령 고향인 구미에 공단이 건설되고 이로 인해 잘살게 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수혜자로서 그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도 외면한 채 그를 추앙하고 있기도 하다.
과연 박정희 대통령 혼자만의 힘으로 구미공단이 건설될 수 있었을까. 구미공단 조성 반세기를 맞아 구미공단의 성과를 정리하고, 새로운 지속가능한 비전을 제시할 때다. 이를 위해 구미공단의 조성배경과 과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구미공단의 조성과정을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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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산업의 탑 착공 당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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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한국경제의 현실전자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설립된 구미국가산업단지(구미공업단지)은 경상북도 구미시공단동, 산동면, 칠곡군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구미공단이 한국경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구미공단의 건설은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6.25전쟁으로 민간부문의 생산시설은 물론이고 도로·철도·항만·통신·전력·수도·학교 등 사회간접자본을 포함한 일체의 직간접적인 생산시설과 각종 공공시설이 파괴되는 암울한 상황에 직면했다. 산업적으로 볼 때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공업시설 면에서 전체의 절반 이상이 완전히 파괴됐으며 부분적인 파손까지를 감안할 때 파괴율은 90%에 육박했다. 이와 같은 총체적 난관을 딛고 일어서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원조자금이었다. 해방 후부터 1964년까지 37억 달러 상당의 원조가 들어왔다. 6.25전쟁 중 막대한 규모로 도입된 미국, 유엔 등의 원조가 도입돼 붕괴 직전의 한국경제에 결정적인 버팀목 구실을 했다. 따라서 이 시기 한국경제는 전면적인 원조체제로 전환됐으며 이들 원조는 전란의 수습과 파괴된 생산시설을 복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전후 서서히 일기 시작한 공업화 정책과 공업화 붐은 1960년대 중반 즈음에야 그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공업화는 지속적인 고도 경제성장과 병행되면서 비교적 순조롭게 추진됐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1차(1962~1966년)성과가 무르익을 무렵인 1964~1966년경에는 공업 및 산업발전에 관한 종합적인 틀이 형성됐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1967~1971년) 중 우리나라 공업화는 새로운 전환을 시도할 수 있을 만큼 제반여건이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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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국가산업단지 제1단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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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공단 조성배경수출에 대한 관심과 의욕이 크게 고조됐던 1960년대 중반 정부는 이러한 발전적인 분위기를 보다 집중화하고 제도화하기 위한 법안을 마련했다.
구미공단은 1964년 공포된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의 포괄적인 테두리 안에서 5년 후인 1969년 제정된 ‘전자공업진흥법’의 특정한 영향을 받아 조성됐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주로 공간적이고 존립적인 근거를 제공했다면 후자는 내용적이고 분야적인 근거를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구미공단이 건설된 법적근거가 위와 같다면 또 다른 배경은 구미가 공단건설 당시 현직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박대통령의 개인적인 욕구가 어떻게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3공화국의 경제정책의 요지가 한사람에 의해 구상됐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
일각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혼자만의 구상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행위자체만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반면 경제정책의 구상이 전문가에 의해 이해 이뤄졌다면 무모함이나 착오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1960년대 우리나라 경제현황을 볼 때 원칙이나 검토보다는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구심점 역할에 더 큰 평가를 두기도 한다.
구미공단 조성의 법적 배경 외에도 입지적 배경을 빼놓을 수 없다. 구미시와 공업단지의 중앙을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관류하고 있어 농공업의 발달을 위한 용수공급에 유리한 자연적인 입지여건을 갖추고 있다. 공업단지 서쪽으로는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고, 대구와 김천 등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있어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외에도 풍부한 노동력고 넓고 저렴한 부지를 구비하고 있으므로 단지건설의 최적지로 선정됐다. 이러한 입지적 배경은 오늘날까지지 구미공단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구미공단의 탄생에는 우리나라 산업화에 대한 시대적 요구과 더불어 자연적 지리적인 최적의 조건을 갖췄기에 가능했지만 무엇보다 지역인들의 유치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구미벌에 공업단지가 건립된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입지적인 적합성을 떠나서 지역에 산업기지가 건설되리라는 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하나의 사건이었기 때문. 뿐만 아니라 단지건설의 추진속도는 엄청나게 빨랐으며 급속하게 변화해 가는 풍경은 보는 이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구릉지와 야산들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공업물들이 들어서는 등 구미벌에는 무에서 유가 창조되고 있었다. 급작스런 변화에 따르는 어려운 문제들 중 무엇보다 지역민들을 설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지역민들은 구미벌에 공업단지가 들어선다는 사실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대로 지켜온 생활 터전을 상실하게 됨을 불안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지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지역유지들은 주민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 결과 지역민들은 구미공단의 건설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됐고 천년의 정과 땀이 스며있는 농토를 묻고 그 위에서 새로운 생활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라는 꿈을 가지게 됐다. 구미공단유치에 가장 결정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여했든 지역인으로 공단설립추진위원장인 장월상씨, 한국도시바(주)를 설립한 재일교포 곽태석씨, 한국폴리에스텔(주)를 세운 이원만씨, 당시 경북도지사 양택식씨를 꼽을 수 있다.
혹자들은 “구미공단의 탄생이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구미가 산업기지의 입지면에서 적합할 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건설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공단의 입지조건을 가진 다른 지역은 없었냐, 경부고속도로가 어떻게 구미를 지날 수 있었냐”며 “구미공단은 박정희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