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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규동 문화관광해설사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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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의 역사문화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곳은 단연 금오산이리라! 구미를 품에 안고 지켜온 세월이 그 얼마이겠는가? 대본산(大本山)이라는 원래의 이름이 말해주듯 구미의 큰 근본이 되고 남쪽의 숭산(嵩山)이라 일컬을 정도로 비중을 가지는 것은 필시 금오산의 가치이리라.
신라 불교를 전파한 아도(阿道) 화상께서 저녁 노을 속으로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金烏)라 이름하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한 연유에 구미시민들은 풍우(風雨)로부터 보호받아 왔고,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로 감성을 자극해주고 있다. 명산 금오산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오늘날 구미의 번영이 금오산 산신령의 조화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일찍이 신라의 의상대사 고려조의 도선국사·무학대사 같은 선승들이 예견하기를 금오산에는 왕기(王氣)가 서려 있음을 설파하였다. 택리지·용재총화 같은 책에서는 “조선 인재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서술하고 있다. 장원방의 수많은 인재들이 출현함은 우연이 아님을 반증해 주기도 한다.
금오산은 각 지역에서 보는 방향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선산 방향에서 보면 붓끝을 닮았다고 해서 필(筆)봉 이라 이름하고 인동 방향에서 보면 큰 거인이 누워 있어 귀(貴)봉이라 일컬으며 뒤쪽 김천에서 보면 쌀가마니를 쌓아 놓은 형상으로 보여 적(積)봉이라 불려지고 성주 쪽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으로 투영되어 음(淫)봉이라고 각각 이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풍수적인 요소로 선산에는 인재가 많이 나고 인동에는 귀한 인물들이 나며 김천에는 부자가 많고, 성주에는 미인이 많이 난다는 속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명산이라고 이름하는 이유는 금오산에만 20여 곳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곳이지만 당시에는 불자들의 기도처로 경향 각지에서 금오산을 오르내렸으리라.
이산이 명산임을 반증하는 이유는 800M 지점이 분지를 이루는 특징이다. 1970년대까지 만해도 성안에는 민가가 있었고, 선산부사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 개의 샘과 일곱 개의 못을 팠다. '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이라는 글귀가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새겨져 있다.
또한 금오산성은 전략 요충지로서 성안에 있는 대원군이 세웠다는 비문이 있는데 1868년(고종 5)에 금오산성(金烏山城)의 성책과 공관(公館)을 보수하였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에는 “1868년에 흥선대원군 섭정 당시 내성을 수축했는데 누각 규모가 100여 칸에 이르렀고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아와 군창을 새로 지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왜적에 대항하는 중요 거점지로 활용되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금오산성 사적비>
금오산의 최고봉은 현월봉(縣月峰)이다. 976M 정상에 달을 매달아 둔다는 의미의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1953년 한미행정협정에 따라 정상에 주한미공군기지가 조성됨에 따라 일반인 접근이 차단되었다. 가슴 아픈 일은 그때 공사로 인해 해동초성 고산 황기로 선생이 쓴 후망대(候望臺) 표지석이 헬기장 공사에 건축자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운 좋게 땅 밑에 잘 보관되어 있다면 훗날에 후인들이 반드시 햇빛을 보게 만들 것을 고대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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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가 주최한 ‘인생샷! 김칠구 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호영씨의 '구미 약사암의 운해 빛나래' 사진.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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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산하면서 금오산을 둘러보기로 하자. 현월봉 아래를 돌아들면 의상대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해동제일문’인 약사암 일주문이 금오산 정상을 찾는 불자들을 맞이한다. 모든 중생들을 질병에서 구해준다는 약사여래가 있는 약사전(藥師殿)은 낭떠러지 절벽에 가공 구조물로 마당을 이루고 있다. 출렁다리로 만들어진 범종각의 범종 소리는 금오산을 넘어 저 멀리 도리천까지 전파되어 뭇 중생을 구제하는 소리로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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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마애여래보살입상(2019년 7월, 경북문화신문DB)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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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우상학이 지은「약사암중수기(藥師庵重修記)」에는 본래 지리산에 있던 석불 3기 중 1기를 이곳 약사암으로 이안하고 나머지 2기를 수도산 수도암(修道庵)과 황악산 삼성암(三省庵)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적고 있다. 약사암의 약사전 내부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로 일광·월광보살이 협시보살로 있다. 불상 뒤편에는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약사암에서 북쪽으로 약 300m지점에 있는 바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높이 5.5m의 금오산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이 조각되어 있다. 부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기도를 하던 산방자와 여래의 만남이 전설로 전해지기도 하는 곳이다. 약사암의 주지인 대혜스님의 법명도 우연이 아니라 금오산의 대혜폭포와 인연이 있으리라.
약사암에서 산등성을 따라 발을 아래로 내리니 물이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요란하다. 27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금오산을 울리고 계곡을 형성하여 금오지에 모여서 구미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준다. 그래서 이름하여 대혜(大惠)폭포라 명하였다 한다.
그 우측으로는 신라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득도하고 야은 선생이 이곳에서 세류폭포의 물줄기를 받아먹으며 도학을 연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르는 길은 험해서 해방 전후 구미면 김승동 면장께서 길을 만들고 도선굴 통로기를 적어 굴 내부에 부착해놓고 있다. 암벽에 뚫려있는 큰 구멍이라 하여 이른바 대혈(大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욕담 김공 선생이 식솔을 이끌고 도선굴로 피난하였는데 당시 왜군이 들이닥쳐 포로로 잡아가고자 할 때 스스로 목에 칼을 찔러 왜적들을 당황케 했다는 사실이 회자되기도 한다. 지금도 암벽에는 ‘浴潭金先生詠歸臺(욕담 김선생 영귀대)’가 음각되어 있다. 욕담(浴潭)은 김공 선생의 호이며 상주북전투에서 전사한 김종무 선생의 차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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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폭포(2019년 7월, 경북문화신문 DB)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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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발을 내려서면 해운사가 자리하고 있다.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대혈사(大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1925년 중창하여 해운암(海雲庵)이라 하였으며, 1956년 3월 대웅전을 신축하였다. 이곳에는 직지사 말사에서만 볼 수 있는 포대화상이 자리하여 넉넉한 절의 인심을 대변하기도 하며, 구미시의 여러 사찰 중 절의 구조를 가장 잘 갖춘 사찰이기도 하다.
등산객들이 오르내리는 길가에 나옹선사의 유명한 시 “청산은 나를보고~”를 적어 등산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게 한다. 이 글을 적은 나옹선사의 학맥을 보면 겸손의 극치를 이루는 학맥으로 이름하고 있다. 지공(知空-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스님의 제자 나옹(懶翁 게으른 늙은이라 아는 것이 없음)선사, 그의 제자 무학(無學_무식한사람)대사, 이들의 법명이 하나같이 자기를 낮추는 법명이다. 과연 대사(大師)라는 호칭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지금도 항간에 이름을 개명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며 유교의 만대 스승인 공자의 이름이 구(丘:언덕구)이며 그의 아들은 리(鯉잉어리)이고, 맹자의 이름이 가(軻:수례가)인 것을 보면 필시 글자에서 운명이 결정되어지지 않음은 분명한 것 같다. 작금에 개명이 대세인데 조상이 지어준 이름을 소중히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한 발 한 발 내려서다 보면 바위 하나, 풀하나 역사의 흔적 속에서 사연 없는 곳이 있으랴. 금오산성의 대혜문 앞을 지나노라면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왜적의 침입으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름 없는 하급 군인들이 이 산성의 곳곳에서 맡은바 직분을 다하며 열악한 군영 속에서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며 현월봉에 걸린 달에 얼마나 간절한 소원을 빌었겠는가. 역사는 걸출한 장군만 기록할 뿐이다. 그들을 생각하며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초라한 ‘금오산성 유적비’라는 돌멩이로 이름하고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등산로 초입 우측에 세워져 등산객들에게 지나치는 이정표 쯤으로 각인하게 하는 것은 구미인들의 무책임한 방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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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성리학역사관 전경(구미시)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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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도선굴 통로를 손본 김승동 면장은 일제 때부터 해오던 치수사업 중 금오한(金烏垾)을 마무리 한다. 증표로 저수지 둑 산 쪽 배수구에 금오한 이라는 머릿돌을 박아 두었다. 대혜폭포로부터 흘러내린 계곡물을 구미인들에게 농업용수로 활용하는 저수지 사업이다. 이 저수지에는 달이 밝으면 금오산에 새로 조성된 성리학역사관의 기와집들이 금오정과 함께 투영되는데 물속에 어색하게 비치는 일주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성리학의 산실 입구에 일주문 형식의 건축물은 구미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혹여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노파심의 발로일까? 금오산의 시원한 골바람이 맹하(孟夏의) 밤을 식히운다.
수없이 오르내린 금오산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있게 알게되어 너무너무 감사해요.
주위에 문화유산들도 많을텐데,우리가 알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을 이렇게라도 알게 해주시길 앞으로도 쭈~~욱 기대기대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07/26 15:42 삭제
일주문 바꿀수도 없고.. 그 위의 간판부터 바꿔야합니다. 경파정이 뭡니까?
07/13 14:23 삭제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07/09 13:35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