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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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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인위적으로 가꾸는 채소나 꽃의 씨앗은 일제히 싹이 튼다. 그런데 야생의 잡초는 싹을 틔우는 시기가 제각각이다. 이처럼 각기 다른 성격을 인간 세계에서는 ‘개성’이라 부른다. 개성은 ‘자기다움’이며, 획일성을 지양하고 각기 다름을 인정하는 다양성을 의미한다. 진로 계획서를 쓰는 학년 초를 맞아 진로 선정은 개성을 꽃피우는 것이 되어야 바람직하다는 원리를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독일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에 사는, 뛰어난 머리를 가진 소년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과 당시의 우수 학생이 으레 선택하듯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때문에 낚시, 수영 등의 소년이 좋아하는 놀이는 금지되고, 그리스어·라틴어 공부를 밤늦게까지 함으로써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주 시험에 합격해서 휴가를 맞이하고서도 목사와 교장 선생은 예습을 강요하여 한스는 두통에 시달린다.
신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었던 한스는 시를 쓰는 자유분방한 ‘하일너’라는 소년을 만나 가깝게 지내게 된다. 그는 이미 자기 나름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어 한스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럼에도 한스는 하일너와의 우정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하일너와의 교제로 낭비한 시간 때문에 성적이 떨어지자 교사들은 하일너와의 관계를 떼어놓으려 한다. 하일너는 신학교를 뛰쳐나와 퇴학 처분을 당하지만 한스에게 하일너는 소중한 친구였기에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한스는 피로를 심하게 느끼게 되어 몸과 마음이 지치는 신경병에 시달린다. 이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못 하게 되거나 싫어하는 것을 강요당하면 병이 생긴다. 결국 한스는 요양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로 신학교를 나오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늦가을 어느 날 엠마라는 한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엠마에게 있어 한스는 연애 장난 상대에 불과했다. 엠마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자 희망을 잃은 한스는 기계 견습공이 된다. 그러던 중 옛 친구였던 기계공 아우구스트의 꾐으로 소풍을 가서 잠시 슬픔을 잊게 되지만, 곧 깊은 환멸에 빠진다. 이튿날 한스는 강변에서 익사 시체로 발견된다.
이 소설은 한 소년의 인간성이 어른들의 명예심과 규격화된 인물을 만들려는 교육제도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곧 자유로운 정신과 개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경직된 관습 및 제도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실제 유명 인물의 학교생활에서도 발견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학교 규율이 군대와 흡사하게 딱딱하고 교육 방법이 지나치게 주입식인 독일의 중등학교(김나지움)에서는 저능아 취급을 받으며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인 스위스의 김나지움으로 옮겨와서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세계 최고의 천재로 성장하게 되었다.
원래 한스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고향에서 자연을 사랑하며 살았던 추억을 간직하고 사는 한스이었기에 숲속의 호수를 좋아하고, 시 짓기에 열중하는 하일너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중지능적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친화적 지능을 지닌 소년이 공부라는 논리수학적지능, 혹은 신학이라는 자기성찰적 지능의 테두리에 갇혀 답답한 형국이라 할 것이다. 그런 만큼 진로 탐색은 개성 및 강점 재능을 따라 자신만의 속도로 이루어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컨대 김려령의 청소년 소설 『완득이』에는 운동 적성을 지닌 주인공 ‘완득이’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제일 잘할 수 있는 거, 하게 놔두세요.”라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두자는 어머니의 이 말은 개성을 존중하자는 뜻이다. 이처럼 ‘잘할 수 있는 것을 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부모나 교사가 자녀나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진로지도요, 행복한 성장의 조건을 최대로 충족시켜 주는 일이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작품에서 한스를 신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어른들과, 오늘날 일류대학에 입학시켜 돈과 권력을 보장받게 하고 싶은 우리 부모들의 모습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좋은 학교, 학과이지만 본인에게 적합하여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분출하는 거친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그의 영혼은 결국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의 힘에 의해 질주하는 수레바퀴는 위험하다. 바퀴살이 하나, 둘 부러져나가도 멈출 줄 모르고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무조건 내달리게 하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 번도 스스로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남의 힘에 떠밀려 달려야 했던 소년 한스의 슬픈 삶의 자리를 말해준다.
반면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기다운 진로 선택을 제시해 주는 영화 작품이 있다. 인도 영화 ‘세 얼간이’에서 세 명의 얼간이는 인도 최고의 명문 공대생들이다. 공대 진학 자체가 집안을 일으키는 출셋길인데다 이들의 목표는 자신의 적성에 관계없이 모두 미국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버는 것이다. 학부모와 학교도 그렇게 부추기고 있어 대학생활이 끝없는 경주가 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환경임에도 그 중 주인공인 셋째 얼간이는 그런 진로 사슬을 깨고 ‘머리’가 아닌 ‘가슴’이 원하는 바를 취한다. 말하자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 곧 개성을 살린 진로 선정으로 성공에 이른다는 이야기이다.
생물계에서 개성은 최적합한 삶을 위해 ‘필요’해서 갖게 되는 생존 전략이다. 예컨대 민들레꽃이 노란색을 띠는 것은 주로 꽃가루받이를 담당하는 곤충인 꽃등에가 노란색 꽃에 쉽게 날아드는 성질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도 개성은 최상의 자아실현을 하며 굳건히 살아내라고 주어진 능력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육의 의미는 아이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들의 강점 재능을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진로를 선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참다운 의미에서 아이들의 행복한 성장을 뒷받침해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바로 이러한 사례를 실증해 주고 있다.
<참고 서적>
우동식, 『청소년의 아픈 자리, 소설로 어루만지다』(정인출판사, 2016), 100~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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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동식 청소년문학교육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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