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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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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집 근처 학교에서 시험감독위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험감독을 하러 다녀온 적이 있다. 한 공업고등학교에서 소방시험, 건설시험 등 여러 종류의 기사시험을 치렀는데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시험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지금 난 어떤 것에 몰두하여 열심히 살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시험감독을 하면서 학교 계단 측면에 부착되어있는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포스트잇의 주제이기도 하다.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최선의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등의 스티커 문구를 보고 최근에 읽었던 책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가 떠올랐다. 계단의 문구들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책은 서울대 종양내과 의사가 만난 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여러 이야기 중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는 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최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대한민국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들을 수없이 이뤄냈고, 전쟁의 폐허 속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는 30-40년 만에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다른 선진국은 200여 년에 걸쳐 쌓은 성과를 30-40년 만에 이뤄낸 고도의 압축 성장. 무슨 일이 있어도 가난을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만들어낸 눈부신 성과였다.(...)그런 시대에서 “하면된다”는 일종의 사회적 종교였고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관이었다. 우리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말 그대로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심지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에 있어서도.“
미국의 조사 결과 항암치료가 필요 없다고 판단되면 6개월은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받는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 암 환자들은 항암치료가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도(평균적으로) 항암치료를 받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다. 보통 이 같은 경우 환자 본인이 판단해 내린 결정이 아닌, 환자들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보호자들의 선택으로 환자의 치료가 이어져갔다고 한다. 따라서 환자들이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원하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죽음에 이르기 한 달 전까지 의미 없는 치료를 연명하는 최선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또 최선을 다한 끝에 남은 한 달이라는 시간은 환자들이 자신이 살아왔던 일평생을 정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될지도 생각해 보았다. 결국 일평생 살아왔던 시간을 정리하기엔 한 달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고, 이미 망가져 버린 몸으로 보통의 환자들은 죽음까지 누워만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환자들도 몇 명 있지만 보통은 모두 이런 식이라고 한다.
예정된 죽음과 남은 삶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최선일까? 환자와 가족들, 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입장 차이는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인지 의문이 든다. 과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