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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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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2012)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그 오래 표류 기간을 견뎌 살아남았는가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뗏목에 호랑이와 함께 탔기 때문이다. 호랑이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고, 그 긴장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고, 그 강함이 그로 하여금 대양을 건너게 했다. 현재 당신이 표류 중이라면, 당신의 호랑이는 누구인가.-김영민 '가벼운 고백' 중에서.
나에게도 호랑이가 있다. 호랑이 때문에 흔들리고 나태해지고 헤맬 때마다 ‘다시’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 ‘다시’가 쌓이면서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기자로서, 신문사를 꾸려가는 사람으로서.
호랑이는 늘 내게 읽고 쓰기를 강조했다. 서평이든, 지역사든, 구미의 인물이든 주제를 정해서 꾸준히 쓰는 습관을 들이기를 바랐다. 정기적으로 무엇이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써보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다 일주일에 하나씩, 그 이상을 신문에 칼럼으로 쓰고 그것을 메일로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다른 소식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문사의 대표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잘 전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면서. 글을 쓰는 기자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격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우편으로 발송되는 신문을 받는 날에는 ‘글 잘 읽었다’, ‘두 곳에서 기사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등등의 피드백을 보냈다. 그러면서 또 다른 글을 기다렸다. 카톨릭 신문에 연재되는 어떤 신부의 글이 보이지 않으면 왜 그런가 직접 물어볼 정도라며 신문을 받는 사람들을, 말없이 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라고 했다. 인터넷 언론을 운영하는 어떤 후배 이야기도 했다. 혼자서 많은 기사를 쓰면서 소식은 그냥 적었고, 자기가 생각하는 중요한 주제들을 기사로 만들어 소개했다고 그렇게 많이 쓰길 바랐다. 쓰고 또 써서 좋다, 나쁘다, 이렇다, 저렇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오히려 편안한 것이라면서.
신문을 통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읽고 있다는 호랑이 때문에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게으르고 나태해질 때마다 역할과 의무를 생각했다. 뉴스 소비 채널이 포털뉴스에서 유튜브로 넘어가고 있는 시대에 누가 종이신문을 보겠나. 점점 척박해지는 언론환경을 탓하며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새롭게’를 새겼다. 세상의 변화도 받아들였다. 그렇게 반복되는 동안 단단해졌다. 어디로 어떻게 갈지 선명해졌다. 또 나태해지고 흔들리겠지만 이제는 한 발짝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호랑이는 또 말한다. “글을 기다릴게요. 의무예요. 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독자에 대한 의무에요. 신문사를 가진 사람이니까 기자이니까.” 또 '다시'를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