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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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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창랑 장택상 컬렉션 전시가 막을 내렸다. 이번 전시에는 창랑의 수집품과 더불어 그의 유품도 전시되었다. 모자, 파이프, 파이프를 보관한 케이스, 안경과 안경집, 면도기와 케이스, 면도용 솔, 미국산 가죽혁대, 외교관답게 여권도 포함되어 있다. 이번에 소개된 여러 유품은 창랑의 생애와 경력을 잘 설명하는 것들이어서 보는 이들에게 남다른 감회를 불러 일으킨다.
창랑보다 앞선 개화 선각자들 가운데서 개화는 받아들이되 단발하지 않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개화를 받아들이는 개화 1세대들은 달랐다. 개화가 반드시 필요하고 시대의 대세이면서 대단히 절박하다고 깨달은 개화 1세대들은 개화를 받아들이는 순간 바로 단발을 결행하였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 더하여 개화 1세대들은 개화를 망설이거나 단발을 주저하는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보이면 집단으로 우루루 달려들어 강제로 단숨에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이를 늑발(勒髮)이라 한다. 자발적으로 단발을 하게 되면 친구나 선후배들이 찾아와서 축하의 자리가 거하게 베풀어진다. 강제로 머리가 깍인 뒤에도 대부분 위로와 축하의 자리가 이어졌다.
단발을 하면 제일 허전한 것이 지금껏 온몸을 눌러 왔던 머리이다. 그래서 개화 1세대들은 단발을 단행한 뒤에 허전한 머리를 달래기 위해 제일 먼저 모자를 구입한다. 머리에 모자를 얹고 나면 어쩐지 옥관자와 두루마기와 도포에 이르기까지 예전에는 익숙했던 복장들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듯이 느껴지고 때로는 거추장스럽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그래서 양복을 입게 되는 것이다. 양복을 입고 나면 다음으로 짚신이나 가죽신이 어색하다. 그래서 서양구두로 바꾼다. 안경, 면도기, 면도솔은 근대인들의 필수도구에 해당된다.
1894년 고종과 황태자의 단발로 시작된 "단발령"은 단순히 머리를 깍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근대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직결되고, 개화파와 수구파를 구분하는 기준과 일맥상통하였다. 머리를 깍고 나면 양복, 안경, 구두, 속옷과 장식품에 이르는 모든 것이 서양물품으로 바뀌게 되고, 정신세계와 생활방식 일체가 근대로 서양식으로 모조리 바뀌게 되는 것이다. 창랑 유품은 개화 1세대의 대표주자인 창랑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다.
9월 12일 오후 2시 금오산의 구미성리학 역사관에서 창랑 컬렉션의 개막식이 열렸다. 개막식에는 지역 유력인사 200여 명이 참가하여 근래에 보기드문 성황을 이루었다. 축사에서 김장호 구미시장은 창랑 컬렉션에 찬사를 보내면서 창랑 장택상선생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재조명에 강한 의지를 가감없이 드러내었다. 민주당 출신의 장세용 전 구미시장은 일찍이 영국에 유학하여 영어에 능통했던 창랑의 면모와 해방 직후 "하지" 미 군정장관의 통역을 맡았던 일화를 소개하였다. 이어서 1920년 대구로 가서 경일은행을 개설하고 부산의 구포은행 개설에도 참가하여 영남의 근대화를 촉진시킨 창랑 집안의 대단한 근대적 각성을 설명하였고, 대구의 남선전기와 상공업 발전을 선도했던 창랑 집안의 과거를 회고하였다. 축사와 기념사에서 같은 취지의 주장이 거듭거듭 뒤를 이었다.
기록상으로 보면 구미 최초의 근대인은 위암 장지연(1864~1921)선생과 왕산 허위(1855~1908) 선생이다. 모두 오태, 임은, 상모에서 활동한 조선을 대표하는 근대적 지식인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오태, 상모, 임은, 사곡, 광평 지역에 근대적 각성이 확산되었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구미와 선산 인동에까지 근대화의 새 바람, 새 물결이 빠르게 전파되기에 이른 것이다.
창랑 장택상은 소년 시절부터 황성신문을 읽으면서 성장하였다. 황성신문 사장이자 주필을 맡은 위암 장지연은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논설로 필화를 당한 뒤에 1906년 아들 셋을 서울로 유학시켰다. 그런데 창랑은 위암의 자녀들보다 앞서 1904년에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한강 이남 10대 부호로 평가되는 집안답게 창랑은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왜관과 대구, 서울에 대저택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창랑은 구미시의 개화 1세대이자 근대화의 선발주자에 해당된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는데 열중하였으니 얼마나 뛰어난 혜안(慧眼)인가. 해방정국부터 정치일선에서 활동하여 철저한 반공주의자의 길을 걸었고, 1952년부터 이승만 반대, 1961년부터 박정희 반대의 길을 선택하여 반독재 민주운동의 역정(歷程)을 죽는 날까지 걸어갔다.
그의 생애는 반공주의자로 본다면 국민의힘에 닿아 있고, 반독재 민주운동의 측면에서 본다면 민주진보와 연결된다. 이번 창랑 컬렉션을 계기로 구미시에서도 창랑 장택상의 생애를 재조명하고, 창랑 컬렉션을 지역사회에 꾸준히 소개할 것으로 전망된다. 적극 환영할지언정 반대할 이유는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전국의 기념사업을 살펴보면 우려되는 바도 없지 않아서 창랑 선생 재조명에 대해 다음을 주문한다.
첫째, 임은, 오태, 상모 마을은 구미시 근대화의 진원지이자 출발지로서 근대역사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상모, 임오, 오태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둘째, 임은과 오태 두 마을의 역사와, 인물, 문화를 체계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사전조사가 요구된다.
셋째, 오태 마을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보전하여 후대에 전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책위에서 모든 사안이 검토되어야 한다.
넷째, 구미시는 영남대학교와 협의하여 창랑 컬렉션이 해마다 개최되도록 노력하여야 된다. 영남대학교와의 신뢰가 축적되면 창랑 컬렉션이 구미에서 상시적으로 전시될 수도 있을 것이며, 멀리 보면 구미에 박물관이 건립되는 다시 없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