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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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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정국으로부터 긴급 소환된 뜨거운 감자가 ‘대학입시’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을 보여주는 깊은 단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어떤 조건에서나 자식의 미래를 위해선 무슨 일도 마다 않고 해내는 엄마의 행위가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 대통령은 대학입시의 정시 전형확대로 해결점을 찾고자 하니, 정녕 우물에서 숭늉을 구할 수 있을까. 자식 사랑으로 포장된 편법과 불법이 그 핵심일진대 이를 고쳐 ‘공정’으로 가려 하지 않고 왜 과거로 회귀하는 방법을 동원했을까. 웬만한 국민은 다 아는 해법은 버리고 굳이 지나온 다리를 다시 건너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무부처 장관이 국정감사장에서 일껏 ‘정시확대는 없다’고 한 다음날 대통령은 정시 비중 상향 방침을 밝혔다. 에둘러 국민의 뜻에 따른다고 했으니, 여론 조사에서 정시 선호 비율이 높게 나온 모양이다. 나는 여기서 사교육 과열이니, 대치동 수요 운운하려는 건 아니다. 특목고의 일괄 전환, 지방이나 저소득층 학생의 학습 지원정책 같은 해묵은 문제를 되씹을 생각도 없다. ‘가르침’의 중요성을 ‘1회성의 뽑기’로 인식한 대통령의 생각에 아연할 뿐이다. 적어도 문대통령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하여 아이들에게도 민주적 가치에 참여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를 기대했고, 정권과 당파를 넘어선 교육정책을 위해, 교육의 십년대계를 위해 노력하리라는 믿음이 송두리째 날아간 터에 그 실망의 정도를 얘기하고 싶고, 교육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가 있는 대통령을 또다시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왔음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일생을 살아도 별로 변하는 것을 못 느끼며 살았다. 삶이 지루하고 더디고, 오늘이 어제와 같으니 내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으며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한평생을 마감하곤 했다. 기껏 종교에 기대어 다음 생이 나을 것이란 희망을 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은 어떠한가. 우리는 삶의 향상 정도를 눈으로 확인하며, 삶이 변화하는 모습을 뚜렷하게 느끼고 또 즐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10년이나 20년 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하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것은 물론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도 모두 바뀌었다. ‘상상이 현실화되고, 상상이 상식화되면서 기존 인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세상에서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변함없이’ ‘지식’을 가르치고, 지식을 바탕으로 ‘표준화된 시험’을 치고, 그 성적으로 ‘뽑는 데’만 신경 쓰고 있다. 이를 두고 ‘공정’에 가까웠노라 자위하련가.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가는 세상에 발맞추지는 못하더라도 교육정책은 그동안 점진적 변화를 가져 왔다고 본다. 자라는 세대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중요해진 만큼 아이들 스스로가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적응할 수 있도록 중학교에 자유학기제를 실시하여 정착되어 가고 있고, 고등학교에는 문이과 통합교육을 시작하였다. 많은 고민으로 이제 그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려고 하는데 또다시 ‘입시 위주’나 ‘성적 줄세우기’에 다름 아닌 정시 확대를 적용한다고 하니 누더기가 된 교육과정을 아예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 작정이다. 문제의 근원은 입시가 아닌 교육의 방법인데 이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정권 초에 대망의 ‘국가교육위원회’를 설립한다 해놓고 여즉 깜깜 무소식인데다, 교육부나 국가교육회의의 존재를 아예 무시한 대통령의 ‘지시’는 오직 ‘입시 유불리’에 치우친 여론을 빙자한 정치적 계산일 뿐으로 ‘교육십년대계’는 안중에도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대입 수시에서 학생부종합전형의 공정성이 크게 훼손되었으므로 정시를 확대하면 공정해진다고 둘러댄다. 약자의 소외나 부의 양극화 문제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시작도 되기 전에 사람들은 ‘공정’이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자유주의와 공리주의, 사회주의가 뒤섞인 채 공통적인 경험을 소유하지 못한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그것도 느닷없이 ‘공정’을 내뱉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다음 파커 파머의 말은 어떤가. “강요된 해결은 거짓 해결이다. 단지 이견을 땅 밑으로 몰아넣을 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하면서 새로운 폭력을 낳는다.”
이른바 민주주의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잇속 때문에 국민을 갈라놓는 정치인은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정치의 실종으로 광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시민들에게 미안해 어쩔 줄 모르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접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걸핏하면 국민을 볼모로 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정치가 그립다. 상대방을 끌어안기 위해 늘 노력하는, 모두를 묶어주기 위해 긴장을 풀지 않는 사람을 보고 싶다. 마땅히 나도 그러고 싶다. 아무래도 이게 ‘민주주의’로 가는 첫걸음인 상 싶다.
<저자소개>
선주문학회 사무국장, 공감독서활동가
대구교육청 1인1책쓰기 지도교사・중앙일보 NIE 연구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