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경북문화신문 |
|
13회 어린이 종합 예술제. 고등학교 문학 지도가 연관이 있어서인지 심사를 보게 되었다. 유치부와 초등학생들의 동시, 산문을 예심부터 보게 되었는데 나름 즐겁고 재미있었다. 오륙십 명의 아이들과 만나면서 그 당당함에 무척 흐뭇하기도 했다. 예심장에 들어서서 소속과 이름을 밝히고 자신의 작품을 암송하거나 읽는다. 그리고는 이것저것 묻는 것으로부터 아이들과 이야기는 시작된다. 외로운 허수아비 아저씨는 참새와 함께 벌써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있었고, 하늘의 구름은 예쁜 색으로 물들어 아이들의 마음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느 날 무당벌레는 엄마 차의 친구가 되어 정겨운 말을 주고받는다. 대추의 쭈글쭈글한 모습에서 할머니의 주름살을 떠올리고는 할머니가 ‘늙어감’을 못내 아쉬워하는 아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아픔 때문에 서대문 형무소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고, 꽃이 피지 않는다고 노래하는 아이……아이들의 마음이 이렇게 아름답고 고운데도 나는 은근히 창작과정의 ‘비리’를 밝히고자 했다. 그런 쪽으로 슬쩍 유도하고 고백을 들으려 했다. 어른들의 ‘모습’이나 ‘빌려온’ 흔적이 있으면 알아서 할 요량인데도 꼭 들춰내서 아이들의 해맑은 표정이 뜬금없이 변하도록 하고야 말겠다고 별렀으니, 참 무람없는 일이다.
아이들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는’ 용기있는 자세는 장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들에 대해 ‘등수’를 정하기 위해서 점수를 매기는 일은 어찌보면 부질없어 보이지만 어쩌랴. 눈 앞에 펼쳐진 일로써 순서를 고할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를. 또 그러한 행사임을 이미 만방에 알렸음을.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보라고 했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의 모습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평가는 정확하게! 이럴 때 ‘배려’는 의혹을 불러온다. 아이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발표를 하고, 나는 ‘작품 외적 사항’을 애써 외면하고 ‘내재적 관점’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다.
요즘 우리 사회는 재능과 잠재능력에 대한 분별이 없다. 흔히 ‘시를 잘 쓰는구나, 시에 재능이 있다’라고 얘기하지만, ‘사물을 바르게 볼 줄 아는구나, 제대로 사물을 보는 힘이 있다’라고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자신의 내면에 눈감은 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기어코 흉내 내야 안심이 되는 시류에서 눈뜨게 해 주어야 한다. 잠재된 자신의 힘을 모르고 이른바 ‘자기계발’에 내몰릴 때, 세상을 ‘쓸모 여부’로만 볼 때, 세상 역시 나의 쓸모만을 계산할 뿐이다. 그러므로 ‘보는 대로’ 말하는 어린 친구들의 용기에 우리는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하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제 자라나는 아이들의 창의성 교육은 읽기나 쓰기처럼 일상화해야 한다.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일정한 수준에 다다른 아이들만 창의적인 학습이 필요한 게 아니라, 누구나 창의성을 바탕으로 해야 앞으로의 세상을 열어갈 수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우 폴 호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자기 자신의 눈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실재를 보게 된다. 마음의 눈을 계발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정확한 의미도 아직 친숙하지 않은 데다가, 미래 사회는 쉽게 상상도 안 되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게 별로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본 적이 없는 세상을 걸어가게 되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앞을 모르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말 잘 들으면’ 아이들의 인생이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직까지 우리의 교육은 이해‧응용이 아니라 암기‧반복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응용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암기 중심의 교육은 창의력을 개발하기는 커녕 있던 창의력마저 사라지게 만든다. 문제해결 능력과 창의성을 단순기능 훈련쯤으로 여기고 기성세대의 틀 속에서 가르치길 원한다.
앞으로는 기계가 할 수 있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창조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것은 서로 이해, 존중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일이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어린이들은 충분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최신 기기들을 잘 활용하고, 변화에 민감하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탐구심도 많으며, 습득도 빠르다. 부모가 아이들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면 아이들은 더 많은 것을 부모에게 가르쳐 줄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하기 좋아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귀 기울이면 잘 설명 해 줄 것이다.
아이를 지지하고 기다려야 한다. 자녀를 가르치려는 부모보다 자녀를 신뢰하면서 함께 배우려는 부모야말로 미래를 열어가는 진정한 부모가 될 것이다. 부모의 신뢰와 지지로 아이들의 생각은 깊어진다.
*그럭저럭 좋은 엄마: 심리학 용어. 부모는 아이에게 최적의 좌절을 제공하여 아이가 깊은 수준의 자기통찰에 이르도록 한다.
<저자소개>
선주문학회 사무국장. 공감독서활동가. 대구교육청 1인1책쓰기 지도교사・중앙일보 NIE 연구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