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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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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철학자 알렌카 주판치치는 공동선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미 존재하는 ‘선’을 공동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 혹은 공동의 것을 ‘선’이라고 한다.” 이미 정립된 선의 개념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향하고 있는 보편적 움직임 속에 내포된 ‘선’의 개념을 도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공동선은 정치적으로 실천이 가능하다고 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지역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관심과 열정이 없고, 세계에 대한 배움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에 정치인들도 공동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봉사하고 있다. 마을이나 지역의 아픔, 갈등에 대한 책임의식 부재는 물론이고, 마을 전체가 정책 결정의 공공 영역에서 배제되어도 별 관심이 없다. 나아가 정치인 자신은 시류에 따라 특정한 행동을 하면서도 이를 당연시 여긴다. ‘적법’을 앞세운 이러한 정치인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과연 면제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그의 행위를 사면해줄까. 대의정치에서 주민의 대표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주민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삶터의 갈등은 결코 ‘법적인 사건’이 아니다. 갈등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이고, 이전에 없던 ‘더 나은 것’이 탄생할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정치인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시도해야 한다.
표를 따라 몰려다니는, 신념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흘러다니는 정치인은 결코 변화를 가져올 수 없고 오히려 변화의 객체로 전락하기 쉽다.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지속적인 실천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실천적 행동은 시민들에게 울림을 주고, 이러한 울림은 사회적 변화의 원초가 된다. 실천하는 정치인은 실천의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결과는 외면하면서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란 말은 분명 허언이다. 마을과 주민, 그 속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직접 겪으며, 때론 웃고 고민하면서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생겨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결과에 책임을 지는 방식과 그러한 의지가 바탕이 될 때 실천적 활동은 가능하고, 그 결과물은 새롭고 풍성할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민주사회로 나아가는 자산이 되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초석이 될 것이다.
정치인의 실천은 단지 타인을 위하고 돕는 전통적인 의미의 윤리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사회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회의 기본 법칙과 질서를 문제 삼아야 한다. 자신의 행복 추구보다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더 중요시하는 암담한 현실을 ‘넘사벽’으로 치부하고 회피할 일이 아니다.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는가?’, ‘이런 일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 가능했는가?’하는 진정한 문제의식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행동 양식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왜곡된 질서를 바꾸는 집단적인 노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
지금은 정치인들, 그리고 예비 정치인들의 계절이다. 이들은 언필칭 주인인 유권자에게 권력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당선만 되면 시민들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것을 극력 거부한다. 오히려 교묘한 수단으로 시민들을 적절히 우롱한다. 이 계절에 주인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가 쓴 코이너 씨 이야기 중 한 토막을 소개한다. 글 중의 ‘기관원’을 ‘○○의원’으로 고쳐보았다.
불법의 시대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배운 바 있는 에게Egge 씨의 집으로 ○○의원이 찾아왔다. 그는 그 도시를 지배하는 자들의 이름으로 발행된 증명서를 내보였다. 거기에는 ○○의원이 발을 들여놓는 모든 집은 그의 것이 된다고 적혀 있었다. 또한 요구하는 모든 음식을 주어야 하고, 그의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은 시중을 들어야 했다.
○○의원은 의자에 앉아 먹을 것을 요구했으며, 몸을 씻은 다음 드러누워 얼굴을 벽으로 돌린 채 잠들기 전에 물었다. “자네 내 시중을 좀 들어주겠나?”
에게 씨는 이불을 덮어주고, 파리를 쫓아주고, 잠자는 그를 보살펴주었다. 그를 위해 온갖 일을 다 해주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마침내 사 년이 지나자 ○○의원은 너무 많이 먹고, 자고, 명령만 하다가 뚱뚱해져서 죽고 말았다. 그러자 에게 씨는 그를 썩은 이불에 말아 집 밖으로 끌어내고, 침대를 닦고 벽에 흰 칠을 한 다음,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아니, 싫소.”
주인의 대답은 분명해야 한다. 그것도 4년 뒤가 아닌 바로 지금 해야 한다.
<저자소개>
선주문학회 사무국장, 공감독서활동가, 대구교육청 1인1책쓰기 지도교사・중앙일보 NIE 연구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