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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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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 추위는 간 곳 없고, 그보다 더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홍역을 치르는 중이다. 현재 28명의 확진 환자가 나온 상태. ‘메르스’로 인해 불안에 떨었던 게 어저께 같은데 또 예의 바이러스 전염병에 전 세계가 전전긍긍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호흡기 및 소화기 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인데, 그 모습이 마치 돌기있는 왕관 모양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코로나 바이러스는 동물끼리 전염되는데, 가끔 변종은 인간에게도 전염되어 사람의 폐를 하얗게 만든다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종류도 다양하다 보니 백신 개발이 어렵다. 게다가 신종이 나타날 때마다 백신을 만들어야 하니 언제나 뒷북을 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지구촌을 떨게 만드는 신종 코로나가 아프리카까지 확산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열악한 보건 시스템 때문에 감염에 취약한 만큼 신종 코로나 유입을 차단하는데 더욱 필사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동아프리카에서는 신종 코로나보다 당장 식량 안보까지 위협하는 메뚜기떼가 더욱 공포스러운 상황이다. 수십억 마리의 메뚜기떼가 사람이 먹을 식량을 모조리 휩쓸고 있는데, 그 양도 어마어마해 하루 3만 5천 명 분을 먹어치운다고 한다. 메뚜기떼는 하루 최대 150km까지 이동할 수 있어,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피해를 주고 있다. 유엔은 “동아프리카는 이미 가뭄과 홍수, 정치·종교적 분쟁 등으로 식량 부족이 심각해 1900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메뚜기떼로 인한 식량 안보, 생계, 영양실조의 위협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일시적으로 메뚜기 떼를 퇴치한다 하더라도 기후변화 문제의 해결 없이는 위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대국굴기.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이 다큐멘터리는 스페인·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프랑스·독일·일본·러시아·미국의 전성기와 그 발전 과정을 다뤘다. 중국에서 제작한 만큼 중국의 시대상과 이들의 모습을 비교·대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시청자들의 요구에 따라 재방송까지 하였으며, 단행본 판도 출간되었다.
지금은 선진국이라고 볼 수도 없고 강대국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1490년경부터 약 100년 동안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일부 계층에만 부가 집중되는 양극화 현상과 상공업의 몰락으로 인민은 궁핍해져 제국의 경제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게다가 막대한 재산을 쌓은 귀족들은 발전적인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편안하게 즐길 생각만 했다. 당시 포르투갈을 방문한 외국인 전도사는 "이곳 사람들은 어떤 고통과 굴욕을 참아낼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절대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고 말할 정도였다. 육체노동이란 흑인과 무어인의 몫이며 배경만 있으면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양반들과 같은 사고였다고나 할까. 일하지 않는 중산층은 국가와 다른 계층의 피를 빨아먹으며 점점 더 거대해졌고 결국 그들은 포르투갈의 몰락을 부추겼다.
이른바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들여다본 중국은 그들만의 강점을 토대로 무섭게 성장하였다. 통제 가능한 정치체제를 이용, 세계 1위의 인구와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세계 경제를 제패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전처럼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며 전 세계를 향해 당당한 울림장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다큐처럼 ‘대국굴기’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한다.
여태까지 우리는 무엇이든 크고 많은 것을 지향하고, 멋지고 화려한 쪽에 온통 신경을 쓰며 살아왔다. 빌딩도 다른 나라보다 높아야 ‘더 잘 사는 것’ 같고, 인구도 많은 도시가 그렇지 않은 쪽보다 더 좋게 보였다. 10세 전후의 아이들까지 외모에 대한 기준은 어른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렇게 내면이 텅 빈 채 크고, 높고, 많은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다 보니 신종 바이러스는 지속적으로 창궐하고 그때마다 쩔쩔맨다. 이제는 멈춰 서서 자문해 봐야 한다. 소득이 높고 풍족한, 인구가 많은 강대국이 되면 이런 사태는 없어질 것인가? 무분별한 육식과 농약 사용, 지구온난화를 무시한 인간의 행복은 대체 어떤 모양일까. 신종 코로나가 천만의 도시 우한이 아니고 인구밀도가 낮은 시골에서 발병했더라도 이렇게 급속히 퍼졌을까. 진정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하기 위해 대국이 되어야 하는가? 문제의 원인을 모르고 해결방안도 모색하지 않은 채 그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잘 먹고 편안하게 살아간다’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알 수 없는 재앙적 위기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어요. 무엇이 더 좋은지 가늠해야만 하죠. 그래서 늘 얻을 것을 생각하고 잃을 것을 정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새로운 길을 찾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유동성의 결과를 두려워합니다.” 희망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경고한다. 인간은 ‘적당한 조건이 되면’ 무슨 역할이든지 할 수 있다고.
<저자소개>
선주문학회 사무국장, 공감독서활동가
대구교육청 1인1책쓰기 지도교사・중앙일보 NIE 연구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