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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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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디지털화되어 가면서 세상은 대변혁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는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수많은 갈등-남녀, 이념, 빈부, 지역, 노사, 세대-에 노출되면서, 중심지대가 없는 극단의 논리로 인해 사회는 더욱 뒤엉킨 모양새다. 최근 유명 정치인의 자기기만으로 인한 죽음은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의 고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자라는 세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자못 우려스럽다. 청소년은 윗세대의 규칙이나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습득하거나 지지하는 수가 많다. 물론 나름의 개성이 있으나 자신의 가치관이 확립이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성인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크다.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반응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인들의 자기기만 행위는 자라는 세대들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130~40년 전 러시아 사회의 이야기인데도, 자리의 조건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추고 그 대가로 화려한 상류 사회에 합류하면서 위안을 누리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데자뷔다. 주인공은 법학교에서 윗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성공에 대한 가치를 습득하고, 윗사람이 허용하는 행동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며,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다. 성장하면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면서 온 삶을 거짓으로 살게 된다. 스스로 부정한 일, 추잡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고위층 사이에서 늘 행해지고 있음을 알고 자신의 생각은 깨끗이 지워버린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로 갈등을 겪지 않는다. 결혼 역시 자신에게 득이 되며,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행하게 된다. 결혼 후 아내의 신경질이 늘어날 때 그는 한층 더 일과 명예심에 집중하면서 아내의 잔소리에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게 된다. 아내에겐 여론이 결정하는 외면상의 품위만 요구하면서. 예심판사로서 자신의 권력과 업무 수완 등 일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항상 그를 즐겁게 했다. 이렇게 성공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이 계속되다가 우연히 옆구리를 다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되고, 죽음과 같이 절망적인 사건을 맞이하여 각성이 일어나지만 기존의 가치를 버리지 못한 채, 즉 자기기만에 대한 각성에는 이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게 된다. 주인공이 죽었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들은 문상을 와서 이렇게 말한다. ‘이반 일리치는 어리석었어. 그에 비하면 자네와 나는 달라. 우리는 어리석지 않아.’
이반 일리치의 상황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선택은 후에 그의 아내까지 모든 것을 남편의 탓으로 돌리게 만드는 타인의 기만을 형성하게 한다. 결국 이반 일리치는 스스로의 고통과 소외를 불러오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의 삶의 태도를 돌아보아야 한다. 결코 해선 안 될 일을 하면서도 항상 당당하다고, 잘났다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기만적 태도는 이반 일리치에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유명 정치인의 삶의 노정이 이반과 다를지라도 기만을 극복하지 못한 점은 마찬가지이다. 높이 쳐든 등불 속의 불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에랴. 그럼에도 이러한 기만을 묻어버리려는 일단의 움직임도 보이니, 이 역시 또 하나의 기만이 아니고 무엇인가. 흔히 어떤 문제 앞에서 ‘왜’는 규명하지 않은 채 ‘같은 편’이란 이유 하나로 문제의 핵심을 슬쩍 지우거나 비켜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는 훗날의 또 다른 논란을 예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극단의 사고로 사람에 주목하지 말고 왜 죽음이 일어났는지를 밝혀야 할 때이다. 진짜 원인을 찾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이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되는 일이다.
다양한 갈등에 노출된 청소년들은 청소년기에 정립해야 할 실존적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자기기만이 습관적으로 굳어질 수 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 다양한 상황들을 마주할 때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적인 자세를 형성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반 일리치가 그러했듯 고통과 불안정한 상황에 부닥뜨리면 이를 재빨리 모면하기 위해 상황을 무시하거나 화를 내고 상대방 탓을 하는 등의 선택을 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반응이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자신의 반응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된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수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를 선택한 데 불과한데도 말이다. 우리는 소설 속의 이반 일리치가 자기기만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선택을 모색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자라는 세대들에게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외부의 분위기에 의지한다든지 남 탓을 하거나 도피의 수단으로 막다른 선택을 하는 것은 문제를 더욱 힘들고 복잡하게 할 뿐이다.
무비판적 편 가르기와 관습에서 벗어나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적 사유와 함께 삶의 기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할 때이다.
<저자소개>
마을활동가・선주문학회원・생활공감정책 참여단・구미시 신활력 플러스사업 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