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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활동가・선주문학회원・생활공감정책 참여단・구미시 신활력 플러스사업 추진단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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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보츠와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민주주의 수준이 높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과정은 예사롭지 않다. 1895년, 악랄한 수탈로 이름난 ‘영국 남아프리카회사’가 보츠와나에 눈독을 들이자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던 보츠와나는 차라리 영국 통치가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 명의 추장은 런던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여왕과 식민장관을 설득해서 영국의 간접 통치를 받는다. 70년간의 기간 중에도 영국의 정치・경제적인 간섭을 제한하고 토착제도를 보전하려 노력한다. 독립 당시에는 중등 및 대학 졸업자를 합쳐야 모두 100명 정도이고 포장도로는 12킬로미터에 불과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축에 속했다. 그러한 보츠와나가 오늘날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하게 되었는지, MIT대학 대런 애쓰모글루 교수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란 저서를 통해 그 이유를 풀어내고 있다. 독립 이전 보츠나와인들은 다원적인 집단의사결정 절차를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독립 후에도 민주주의를 고수하고 주기적으로 경쟁 선거를 치르면서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를 발전시킨 덕분이란 설명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경제적 번영의 길로 가려면 무엇보다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정치이고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수탈적 체제 아래에서도 경제는 발전할 수 있는데,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문에 자원을 몰아줌으로써 한동안은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혁신과 창조적 파괴 없이 이뤄지는 성장은 지속될 수 없다. 한때 미국을 제칠 기세였던 소련은 결국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고, 같은 맥락에서 수탈적 체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중국의 고속성장 역시 지속될 수 없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놀라운 성장의 활력을 보여준 미국의 자본주의도 포용성이 떨어지면 한낱 짝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국가의 실패를 지도자의 무지 탓으로 돌리는 건 오해다. 소수 엘리트가 수탈적 제도(착취적 제도)를 고집하는 것은 경제발전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고 포용적 제도가 불러올 창조적 파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창조적 파괴는 부와 소득뿐 아니라 정치권력도 재분배함으로써 지배층과 인민이 나란히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불과 반세기 만에 선진국들을 거의 따라잡았다. 하지만 진정한 혁신과 창조적 파괴를 용인하는 포용적인 제도가 확립되지 않으면 한 차원 높은 발전단계로 뛰어오를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엘빈 토플러는 IMF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김대중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철 지난 중앙집권적 관료 시스템을 개선하는 한편 정부의 근본적 변화를 절실하게’ 요구하였다 한다. 이는 헌법 개정과 국가기능의 지방 이전을 핵심으로 하는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거의 20년 전의 이야기인데, 놀랍게도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변한 게 별로 없다.
최근 들어 지방분권이니, 주민자치니 하면서도, 포용적 제도가 없으니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분권이나 주민자치에 관한 법령을 만들면서도 그 시행은 ‘따로 법률’을 정한다고 하여 발목을 잡아 놓는다. 독소조항을 반드시 넣어둔다. 또 어정쩡한 분권 체계는 중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신호등만 해도 주민의 편리를 위해 주민이 낸 세금으로 조정하면 될 것을 경찰에 위임함으로써 전국이 획일화되어 있다. 모든 지방 사무에 대한 정책 결정부터 집행, 그리고 그 해석(사법)까지 중앙에서 쥐고 있으니, 진정한 혁신은 고사하고 중앙정부 스스로가 걸림돌인 셈이다.
모든 지방의 문제들을 중앙에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 답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국민의 수준을 불신한 채 그냥 모든 걸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이게 국가의 실패로 가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자기 결정과 자기 책임이 국민을 성숙하게 하고,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을 중앙정부에서 모를 리가 없다. 국토방위를 위해 가정에서 개인화기는 물론 대포까지 관리하고 틈틈이 놀이 삼아 사격연습을 하는 스위스 사람들, 그들의 ‘내가 만든 나라니까, 내가 지킨다’는 자부심은 ‘권리와 책임’의 결과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실패한 국가의 공통점은 착취적 제도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사회의 나머지 대다수를 희생시켜가며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세력과 엘리트 관료층의 착취는 나라마다 경우와 정도는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여 국민을 어둠 속에 가두어 두는 이유는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국민이 건강하고 현명한 나라는 강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국민의 창의성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애쓰모글루 교수의 저서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스스로 미래를 열어가고자 하는 국민들과 함께 ‘K-국가’의 길에 능동적 주체로 참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