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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원 마을 매니저ㆍ구미시 생활공감정책참여단 대표ㆍ선주문학회 회장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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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의 말을 들어보자. 모든 사람에게는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 있고, 만약 불평등한 제도가 있다면 그 제도는 사회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되고 그 모든 절차가 공개되어 있을 때만 허용될 수 있다고 했다. 롤스는 이같은 정의와 불평등의 두 원칙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질서 정연한 사회로 규정하면서 이런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신념체계를 지닌 다양한 집단들이 공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가. 소수의 여러 집단이 아닌 다수로 구성된 권력 집단만이 질주를 즐기는, 정의 원칙이 사장된 사회가 아닌가.
공정‧정의‧평등으로 출발한 지금의 정부는 오히려 이러한 가치를 훼손하다 못해 배신하였다. 게다가 반성의 자세는 조금도 없고 그들만의 생각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데 열중이다. 최근에는 권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대물림하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들에게 변화의 단초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권력을 그러한 곳에 작동시킬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정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변화의 출발점에 서야 하지 않을까.
첩첩산중인 현실의 난제들을 정치인들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자신의 배만 불리면 그만이지 능력없어 그러지 못하는 사람까지 어떻게 챙기느냐가 그들의 솔직한 심정일게다. 국민을 귀찮게 여긴다면 좀 과한 표현일까. 무능력, 무개념에다가 권력을 업은 채 국민의 삶까지 멋대로 해석하는 정치권이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들이 우습게 보는 아랫사람들이 동력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 동력을 보고 그들이 깨닫고 움직일 수 있도록 공론장을 펼쳐야 한다.
2명 이상의 공중이 공적 사항을 논의하는 것을 공론이라고 한다. 그런 과정을 공론화, 공론이 이뤄지는 공간을 공론장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붕당정치를 움직이는 중요 요소로써 공론이 있었는데, 선조 이후엔 조정 대신이나 왕까지 공론을 따라야 하는 원칙으로 삼을 만큼 중요한 정치적 요소였던 것 같다. 이는 이른바 엘리트 공론이었기에 붕당정치가 부정되면서 자연히 위축되고, 17세기 이후엔 민중의 정치참여 요구로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일찌감치 공론의 장은 열렸지만,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신고리 5‧6호기 시민 참여형 조사를 시작으로 전국 규모의 공론화가 시작되었다. 최종 목적은 시민의 의견을 반영한 정책적 의사의 결정이었다.
신고리 5‧6호기 공론에 참여한 시민들의 의사결정과정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참여자의 41.4%는 공론화 이전과는 다른 의견의 변화를 보였다. 그리고 공론화 이전 찬반에 대한 유보를 보인 사람이 161명이었으나, 공론화 이후에는 15명으로 대폭 줄어든다. 더구나 20% 정도는 찬반의 입장을 상반되게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시민참여형 조사는 일반 여론조사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시민참여단이 합숙토론, 종합토론회, 전문가 발표와 질의응답 등의 학습과 공론화 과정에 참여하면서 드러난 숙의성과 숙의 효과인 것이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여부를 둘러싼 의제는 갈등이 첨예했던 초기와는 달리 공론화를 거치면서 갈등이 완화되었고,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여론이 수렴되었음은 물론이다.
민주사회에서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공론장은 이처럼 중요하다. 그렇지만 모든 의제를 언제나 이런 식으로 공론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공감의 중요성, 토론과 절차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관련된 것은 우리가 주체가 되어 공론장에서 숙의하고 토론해나가야 한다. 공정과 정의로 포장된 달콤한, 국민의 공감을 무시한 권력의 자기 목적 실현을 위한 공론에는 숙의가 빠질 수밖에 없다. 국민의 생각을 수용할 생각이 없으니까 천편일률적으로 그냥 용역에 맡겨 공론을 진행할 뿐이다. 얼추 잡아놓은 일정에 따라 ‘인원’ 동원에만 신경을 쓰고, 의도한 결론만이 중요하게 여긴다. 최근의 대구 경북 통합 논의만 하더라도 의제 학습과 숙의를 통한 공론에서 한참 먼 것이었기에 결국 주민들과의 거리만 노출되었을 뿐이다.
중앙은 중앙대로 지방은 또 지방대로 토론과 논쟁이 없는 왜곡된 의사결정을 위한 공론화에 매달린다. 설사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 일이라도 만족도가 낮은 의제에 대해선 또다른 합의 요구를 하는 세상이다. 시대는 더욱 다원화되고 다양화하는데, 자꾸만 뒷걸음질로 주민삶을 무시하는 결정을 하고 있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말이다. 대체 무엇이 그리 바쁜가.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숙의라는 긴 과정을 요구하고 또 끈질기게 참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