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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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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이 구미를 떠난다는 소식이 잇달아 들린다. 구미를 떠나겠다는 기업에 찾아가 마치 떠나지 말아달라고 하소연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제안을 하는 단체들도 있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바로 사람이다.
구미를 떠나는 기업이 파생시키는 문제 중 가장 큰 것은 구미 경제력의 축소가 아니라 가족이나 고향을 두고 새로운 이전지로 떠나는 해당 기업 직원들의 고통이다. 기업은 이윤추구가 목적이기 때문에 더 큰 이익이 있다면 타지역이든 외국이든 가리지 않고 떠난다. 국경이 없는 자본의 논리와 마찬가지다. 떠나는 기업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왜 그들이 떠나는가를 파악하고, 이 지역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가 문제다.
하인리히 법칙은 사고에 관한 법칙이지만 여기에도 적용할 수가 있겠다. 하인리히 법칙은 '1:29:300 법칙'이라고도 부른다. 즉 큰 재해와 작은 재해 그리고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 1:29:300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구미가 지금 처한 상황이 1에 해당하는 큰 재해는 아니고 29 내지 300에 해당하는 다소 작은 문제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금 구미가 해야할 것은 1에 해당하는 큰 재해를 피하기 위하여 최근과 같은 탈구미 현상들을 보며 기업들이 구미를 떠나게 된 과거를 되돌아보고 중장기적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글의 논점이 잠시 흐려졌다. 정주여건의 개선이 갖는 의미를 정의해본다. 얼마 전 지역민들과 구미 정주 여건 개선에 대하여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필자는 구미 정주 여건이 의미하는 것이 ‘구미가 번성하는 것인가’와 ‘사람이 살기 좋은 것인가’를 구분하여 질문했다. 참여자들이 이를 쉽게 이해하지 못해 위의 광개토대왕 얘기를 꺼냈다. 광개토대왕은 한국인 입장에서는 영웅이지만 중국인 입장에서는 과거의 큰 도둑이었다. 그리고 엄밀하게 보면 당시 한반도 북부에 위치했던 민족 뿐만 아니라 고구려인들마저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인물이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국가의 선을 어디에 긋는 지가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담보할 만큼 가치있는 일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한국 인구가 5300만인데 경계선을 새로 그어 구미시민이 40만명에서 50만명이 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미시가 잘된다는 것은 사람들의 실제 삶에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고 오히려 초점을 맞추어야할 것은 어느 지역에 속하건 상관 없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약한 국가가 외세의 침략을 받아 국민들의 삶을 곤경에 빠뜨린다. 잘못된 정책들이 기업들을 타지로 내몬다. 기업은 항상 경영하기 좋은 여건을 찾아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 산업혁명을 먼저 경험한 국가들은 지역민들의 삶을 보다 쾌적하게 만들기 위하여 굴뚝산업을 일부러 제재하며 친환경 산업 구조로 변모해왔다. 구미 정주 여건 개선에서 중요한 것은 구미의 발전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보다 안전하고 쾌적해져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삶이 사회화되고 조직화된 것이 구미라는 추상적 이름이니 구미의 행정, 정치는 시의 발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아야 본질에 부합하게된다.
글을 정리하자면 정주여건 개선이란 의미는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핵심이지 경계 그어진 지역의 발전이 핵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의 주위에는 머지 않은 시기에 타지로 전배될 일을 걱정하며 집 구하기, 가족과의 이별, 자녀의 교육문제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 정작 위로 받아야 할 이들은 그들이다. 구미시 당국자는 기업들이 떠나는 이유를 깊이 고민하고 적어도 떠나게 된 기업과 그 직원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것이 우선일 거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구미는 그 사람들에게 좋은 정주여건을 제공하지 못했다. /전승조 구미시의 인의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