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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규동 문화해설사의 구미이야기(7)]어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 인동

경북문화신문 기자 / gminews@hanmail.net입력 : 2022년 09월 26일
↑↑ 여규동 구미시관광문화해설사
ⓒ 경북문화신문
인동은 ‘어질고(仁) 의로운(義) 이웃이 한마음(同)으로 화합하며 살아가는 동네’라는 뜻으로 삼한시대는 군미국, 신라 경순왕대에는 사동화현, 그 이후에는 수동(壽洞), 옥산(玉山), 인동(仁同)으로 불리었다. 그러다 1978년 구미시 승격으로 칠곡군 인동면에서 구미시 인동동으로 편입되어 현재 강동(江東)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동쪽으로는 천생산이 병풍처럼 펼쳐있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동네를 휘감아 돌아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조 선조가 다스릴 때는 도호부가 위치하고, 고종 때는 인동군이라는 지명으로 불릴 만큼 발달한 지역이었다. 서원과 향교 둘 다 위치해 있다는 점은 이곳이 본디 교육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당한 발전을 했던 지역임을 암시한다. 신라시대의 고분군을 비롯해 임진왜란 당시 꾸준히 의병이 활동했던 기록, 삼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고을 중 하나라는 것도 이곳의 역사가 유구함을 추측할 수 있는 증거이다.

또한 정조(正祖1776~1800년) 사후 인동에서 큰 사건으로 인하여 도호부에서 현(縣)으로 강등된 아픈 역사도 정약용 선생의 ‘다산시문선’에 ‘기고금도장씨녀자사’란 제목으로 쓰여있으며, 이른바 ‘인동작변’으로 불리운다.

인동의 진산인 천생산부터 살펴보자!
천생산성은 축성방식이 삼국시대 산성으로 보고 있다. 천생산은 자연조건에 의하여 보이는 모양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천생산(天生山)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쪽에서 보았을 때 산 정상 부분이 평평하여 하늘 천(天)자와 닮은 하늘이 내놓은 산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 산 모양이 함지박을 엎어서 산 위에 얹어놓은 것과 같다 하여 방티산이라고도 하고, 천생산성을 박혁거세가 쌓았다 하여 혁거산이라고도 불린다. 서쪽에서 보면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다 하여 병풍바위, 정상 부분이 한일(一)자와 같다 하여 일자봉이라고도 하며 남쪽에서 볼 때에는 사자가 포효하는 모양으로 보인다고도 한다.

산성 안에는 네 곳의 연못이 있으며 남문 터와 북문 터, 동문 터가 남아있고, 한 곳의 비밀리에 드나드는 암문(暗門) 터와 수구(水口) 터도 남아있다. 지금의 성벽은 임진왜란 이후 천생산성의 중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1596년에 인동현감 이보(李甫)가 수축하였고, 1601년과 1604년에는 찰리사(察理使) 곽재우(郭再祐)와 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수축하고 별장(別將)을 두어 적의 침입에 대비한 중요한 산성이다.

이곳에는 미덕암(米德岩)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병항쟁과 관련하여 왜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쌀로 말을 목욕시킨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미덕암 이야기는 장군이 구미지역에서 의병항쟁을 한 기록은 없어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에 찰리사(察理使)로 온 곽재우 장군이 천생산성을 보수한 이야기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측한다.

1584년 (선조17년)에 겸암 류운용 (柳雲龍)선생이 인동현감이 되어 고려 충신인 야은 선생에 대한 추모와 현양(顯揚) 사업에 착수한다. 전임 조천개 현감이 착수하다 전염병으로 타계(他界)하고 중단되었던 사업을 고을 유자(儒者)들과 협의하여 오포(오태동)에 중건하게 된다.
3년간에 걸쳐 야은을 배향한 오산서원(吳山書院)의 공사를 마친 뒤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라는 기념비를 세워 오늘에 이르도록 했다. ‘지주’라 함은 중국의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기둥처럼 생긴 석산(石山)으로 탁류 가운데 있으면서 흔들리지 않는 산을 말하는 것으로, 지주중류비는 앞면에 중국의 양천천이 쓴 글씨를 한강 정구선생이 탁본해서 가져온 글씨를 모각(模刻)하였으며, 음기(陰記)는 그의 아우 서애 유성룡이 찬(撰)했다고 적고 있다. 원래의 비석은 선조 20년(1587) 홍수로 매몰되고 지금의 비석은 정조(正祖) 4년(1789년)밀양의 해석을 운반해 와서 다시 세운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인동지역에는 조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서울종로 네거리를 위시한 전국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세운 척화비((斥和碑)가 우리 구미 구포동 산 52-1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로 적고 인적이 많이 오가는 구포동 고개에 비(碑)를 건립하였다.
보통 다른 척화비는 돌을 매끈하게 깎은 조형물의 형태라면 이곳에 세워진 척화비는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인동지역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며 제향공간인 향교와 동락서원이 근방에 나란히 위치하는 것에 의아심을 가지는 이들도 있다. 본래 한 고을의 향교는 교육과 성현에 제향하는 기능 때문에 관아에서 약 4리 정도에 둔다. 그러나 서원은 고을의 풍경이 수려한 곳에 위치를 한다. 인동지역은 특별하게 본디 인의동 지역에 위치했던 향교가 1988년 도심이 확장되면서 동락서원 옆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오늘날 낙동강변 구미대교 옆에 향교와 서원이 병립(竝立)하게 된다.

인동향교는 조선시대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향기능으로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고종 말기에는 인동국민학교의 전신인 옥성학원(玉城學院)이 설립되어 명륜당을 교사로 쓰기도 하였다.

부지암정사는 여헌 학문이 구체적인 저술로 드러나는 모태이자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강학처의 중심지이다. 여헌이 세상을 떠난 후 부지암정사 자리에 ‘부지암서원(不知巖書院)’이 세워졌고, 숙종대에 ‘동락서원(東洛書院)’으로 사액되었다. 동락(東洛)이란 동방의 이락(伊洛)이란 뜻이다. 조선 인조 때 여헌 장현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그러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현재 복원된 동락서원의 오른쪽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부지암정사는 동락서원이 훼철된 뒤인 1885년에 중건되었으나 이후 퇴락을 거듭하자, 1975년 다시 지은 것이 현존하는 부지암정사이다.
동락서원에는 장현광 선생의 유물인 가죽신, 삿갓, 우산대, 지팡이 등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중정당(中正堂)·윤회재(允懷齋)·근집재(謹執齋)·문루인 준도문((遵道門)으로 구성된 강학 공간을 두고, 뒤쪽 높은 곳에는 내삼문·사당으로 이루어진 제향 공간을 배치했다. 동재 서재의 현판의 의미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남긴 말인 윤집궐중(允執厥中)에서 따온 듯하다 또 천연대(天淵臺)는 시경의 대아한록편에 연비어약(鳶飛魚躍)에서 인용한 듯하고 인륜의 도는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와 같이 행하는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동락서원 앞에는 은행나무, 수령이 400년이 넘어가는 거목이 서 있다.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동락신나루와도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해 언제나 서원과 그 길 주변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길손들이 쉴 수 있도록 그늘을 만들고 있다.

또 송은 장안세를 배향하고 있는 구미 인의동 옥계서원도 있다. 1774년 구미 인동에 옥계사로 창건되었다가 1871년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것을 1989년에 지금의 인의동에 옥계서원으로 다시 세웠다.

이 밖에도 죽정(竹亭) 장잠(張潛)의 위패를 모시는 현암서원(賢巖書院)이 있고, 그 앞에는 진사 장잠이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등과 더불어 학문을 논했던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있다.

또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이곳이라는 데서 인동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일제 치하인 1919년 경북 중서부지역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확산시킨 기폭제 역할을 한, 구미 인동 3.12 독립만세운동이 3월 12일·14일 두 번에 걸쳐 학생과 지역유지들이 결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3.1문화제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고유제 및 추모식을 통하여 만세를 부르며 기념하고 있지만 그때 당시의 인동민들 열정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인(仁)의 고장은 낙동강을 끼고 일찍이 4세기경부터 황상동에 고분군을 만들 정도로 세력을 형성한 부족들이 살던 곳이며, 역사 속에서 인동부로서 자리매김하고 천생산에 올라 그 역할을 다해 왔다. 근대에 칠곡군에서 분리되어 구미로 통합되면서 구미공단 제4단지, 5단지의 특화된 국가공단으로 또 한번 옛 영화를 꿈꾸는 신천지가 되어가고 있다. 이 또한 인동의 지리적 여건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일찍이 시인묵객 (詩人墨客)들이 인(仁)을 노래하고 학문을 숭상하였으며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서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고을민들이 사는곳, 그 고을 이름이 인동(仁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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