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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규동 구미시관광문화해설사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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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의 매봉산 천의봉 너덜샘에서 발원하여 황지연못에서 용출된 후 구미시를 거쳐, 경남 창녕군과 부산광역시를 지나 남해로 흘러든다. 길이는 510km이고, 유역면적은 23,384㎢이다.
낙동강이란 이름이 처음 쓰인 것은 동국여지승람이지만 이보다 훨씬 이전인 삼국 시대에 김해 일대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가락국의 황산나루 땅을 흐르는 강이라는 뜻에서 황산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낙동(洛東)이라는 이름의 뜻은 낙양 동쪽에 흐르는 강이란 의미이다. 낙양은 지금의 상주를 말한다.
인재(訒齋) 최현(崔晛)선생의 일선지에는 삼척부(三陟府) 황지(潢池)에서 발원하여 부(府)의 북쪽 비봉산 뒤로 흘러들어 온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1980년 학계에서는 현지답사를 통하여 금대봉 남쪽에 있는 너덜샘을 발원지로 공인하였다.
나루는 강을 건너다니는 곳이다. 옛날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면 배로 건너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목이 있기 마련이고, 거기가 나루터가 되기 마련이다. 나루터는 삶의 현장이 되고, 맛난 음식과 주막이 있어 로맨스가 있고, 무엇보다도 돈이 있었다. 선산읍 원리 강창나루, 고아읍과 해평면을 잇는 강정나루, 비산동 비산나루는 구미지역 3대 나루라고 할 수 있다.
낙동나루는 예로부터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다. 배로 실어 온 낙동강 하류의 물자를 여기서 수레에 옮겨 싣고 문경새재를 넘어 중부 내륙으로 운송했다. 서울로 왕래하는 영남 지방 사람들 역시 반드시 거쳐 가는 길목이었다.
그 길목에는 영남사림파의 영수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고단한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진 흔적이 있다. 당시의 지식인으로서 간과하지 못할 양심이었으리라! 이른바 '낙동요(洛東謠)라 제목하고 그 현판을 관수루에 걸게 된다. 의성과 상주의 길목인 낙정나루에 자리하고 밀양의 영남루, 안동의 영호루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정자로 이름하는 관수루에서 당시 권신들의 잔치를 목격하고 자신도 선비임에 양심을 토로했다.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묵과(默過)하지 못한 듯하다.
황지의 원천은 겨우 잔에 넘칠 정도인데(黃池之源纔濫觴·황지지원재남상)/여기까지 흘러와선 어찌 이리 넓어졌나(奔流倒此何湯湯·분류도차하탕탕)~~남쪽 백성들 가렴주구 어이 견디랴(南民何以堪誅求·남민하이감주구)/쌀독은 비고 도토리마저 떨어졌는데(缾甖已罄橡栗空·병앵이경상률공)/강가에선 풍악 울리며 살진소를 잡네(江干歌吹椎肥牛·강간가취추비우)/조정의 사자는 유성같이 지나치니(皇華使者如流星·황화사자여유성)/길가 해골에게 누가 이름이나 묻겠는가(道傍觸髏誰問名·도방촉루수문명).
이 시(詩)를 일러서 조선 중기 문장가 상촌 신흠 선생은 ‘당대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꼽았다. 그리고 압구정 한명회와 교우한 사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허균조차도 그의 시를 높이 평가 했다
도도히 흐르는 물줄기를 따르다 보면 선산 원리의 강창(江倉)나루에 닿는다. 강창은 선산부의 하운창(河運倉)으로, 강변 지역의 여러 사창(社倉), 염창(鹽倉)역 등이 물류기지의 역할을 했으며, 또 선산부의 관문에 월파정을 지어 사신들을 직접 영접한 여진(여차니진)이 있다. 여차니진은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 선산읍 생곡리 앞 지금의 일선교 근처 태조방천으로 불리는 낙동강 연안에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위한 싸움에서 크게 이겼던 곳이다.
강정나루는 여진나루의 하류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 보천탄(寶泉灘)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의 매학정 주위 근처로 추정된다. 점필재 김종직은 이 나루를 선산의 10경 중 하나로 꼽아 시를 읊기도 했다.
매학정(梅鶴亭) 남쪽 숭선교 인근 강정나루터인 이 나루는 옛날 과거길, 소금배의 경유지부터 농사용 뱃길, 장 보러 가는 길까지 물류와 교통의 주요 길목이었다.
비산(飛山)의 원래 이름은 비산(緋山)이었다고 전해진다. 지역의 흙이 붉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일제 시절 비산(飛山)으로 개칭됐다고 한다. 그래서 갈뫼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당시 갈뫼시장이 있어 소금배가 오는 날이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각종 어물과 소금, 생필품 등이 이 시장을 통하여 유통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근 칠곡·김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품들과 물물교역 형태로 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이고, 장터거리에는 호객하는 사람, 술꾼들의 잡음으로 떠들썩하였을 것이다. 또 비산에는 향교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본시 1읍(邑)1교(校)이라 독립된 현(縣)인지는 고증할 수가 없다.
비산이란 동네는 지금은 공단동을 합쳐서 그 이름을 다시 비산(飛山)으로 하였다. 아쉬운 것은 이번 기회에 본래의 비산(緋山) 붉은 비단의 산, 갈뫼의 이름을 되찾길 희망하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그대로의 비산(飛山)을 사용하는 아쉬움이 있다. 산이 날아가면 어찌 되겠는가? 날뫼가 될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조선시대 공부제도가 현물에서 금납제로 바뀌고,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나루의 역할은 점점 좁혀져 갔다. 이렇듯 이번 힌남노 태풍에서도 경험하였듯이 구미는 금오산의 줄기에 기대어 낙동강에 젖을 먹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도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나룻배 전망대에서는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으며, 나룻배 전망대 안에는 옛 전통 나루 문화의 활용, 전국의 나루터 및 인근 명소, 옛 나루의 모습이 담긴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콘텐츠의 빈약으로 흥미를 주지 못하며,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어차피 낙동강 둔치에 조성했다면 하류쪽 유효지를 활용하여 동락서원과 나루터로 연결해서 이계천에 용비교(龍飛橋 )같은 다리를 하나 놓고 진평동의 구미과학관과 연계해서 벨트화한다면 구미지역의 관광자원에 한 축이 되리라 생각해본다. 구미의 자연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많이 알고 갑니다.
10/12 10:16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