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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지(evesj10@hanmail.net)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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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안동찜닭을 먹으러 갔다. 학생 때부터 종종 다니던 단골집인데 함께 간 것은 처음이다. 먹고 와서는 맛있었다며 노래를 부르길래 집에서 한번 만들어 보기로 했다.
찜닭은 종종 만들어 보았지만, 맛집과 같은 맛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간장을 베이스로 하는 요리다 보니 맛깔스러운 검은 빛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상 콜라도, 커피 가루도 아니었다. 무슨 비법이 있을 텐데…. 형사가 범인을 쫓듯 여러 레시피를 뒤지다 단서를 찾아냈다. 캐러멜소스! 시판용도 있긴 하지만, 흑설탕을 뭉근한 불에 녹여 만들 수 있단다. 바로 이거다! 느낌이 온다.
퍽퍽한 살을 싫어하는 가족의 입맛을 고려해 닭다리 살을 데친다. 감자, 당근, 양파, 양배추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간단한 양념과 캐러멜소스로 풍미를 더한다. 마지막으로 빨간 건고추, 불린 당면과 떡을 넣어주면 요리 끝!
남은 건 심사위원들의 평가다. 처음 오디션에 참가한 가수 지망생처럼 입이 바짝 마른다. 시선은 젓가락 끝만 따라 흐른다. 첫 번째 심사위원인 아들은 한입 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지를 우뚝 세운 채로 할 말을 잃은 듯 정지 화면이 된다. 대사 한마디 없이도 표현력은 연기 대상감이다. 다음은 남편 차례. “이야~ 이제 그 집 갈 일 없겠네. 더 맛있는 것 같은데? 장사나 할까?” 남편과 아이는 요리로 배를 채우고, 나는 달큼한 행복으로 마음을 채우는 저녁이다.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한다. 많이 먹는다거나, 무엇이든 안 가리고 먹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내 입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즐겁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고도 기껍다. 여행지에서도 유명하다는 음식은 한번 맛보고 싶고, 먹기 위한 여행도 좋다. 단순히 배만 채우려 쓰는 돈은 한없이 아깝기만 하다. 혼자 먹는 끼니는 대충 때워도 가족 식사는 잘 차려 먹으려 한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은 직접 만들어 보고, 가장 입에 맞는 맛을 찾으려 고민한다. 어떤 때는 사 먹는 게 훨씬 싸게 먹힐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찾은 요리들은 밖에서 사 먹을 일이 없다. 생각날 때마다 언제든 해 먹을 수 있는 우리 집의 황금 레시피가 된다. 솜씨 좋은 사람들처럼 뚝딱 만들어 내지는 못해도, 조심조심 칼질하고 눈금 맞춰 계량하여 열정을 더할 뿐이다.
들인 노력과 재료비가 무색할 때도 종종 있다. 무언가 부족한 느낌은 딱 2%뿐인데도 맛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럴 때도 먹성 좋은 남편과 아들은 풀죽은 나를 괜찮다 위로하고 맛있다며 먹어준다. 가족들의 이해와 배려가 부족한 음식에 구뜰한 맛을 더한다. ‘단맛이 많이 들어간 것 같아’, ‘좋아하는 재료를 더 넣어주면 좋겠어.’ 쌉싸래한 의견도 통 크게 소화시켜 본다.
하루는 저녁 준비를 하려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재료도 냉장고만 열면 다 있고 그다지 거창한 요리를 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사소한 일로 남편과 냉전 중이긴 했지만, 그런 일이 처음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다. 가끔 꾀가 나는 날은 사다 먹은 적도 있지만, 마음속이 온통 미움과 원망뿐이니 요리는커녕 사다 먹일 맘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를 먹이는 일이 절대 사랑 없이는 안 되는 일이구나…!’ 숭고한 깨달음도 잠시 ‘근데 내 사랑을 꼬박꼬박 받아먹고 니가 나를 이렇게 상심하게 해?’ 아니꼬운 생각에 더욱 악다구니가 받쳤다. 에라 모르겠다 드러누워 나 몰라라 해버렸다.
내 손으로 가족들을 해 먹이다 보면 예전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엄마 밥을 먹고 다니던 시절, 내 몸뚱이 하나 치장하고 다니기만 바빠 그 정성을 모르고 살았다. 가리는 것도 많고, 짜네 다네 말도 많았다. 까탈스러운 딸내미에게 큰소리 한번 없이 그저 해주고도 죄인처럼 쩔쩔매던 엄마였다. 내 자식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 가르치는 내가 한사람이 맞나 싶다. 결국 겪어 보아야만 겨우 깨달아지는 나의 어리석음도 어지간하다. 뒤늦은 후회가 맵다. 철없는 나의 행동이 혹여 엄마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면, 기자들을 모아놓고 대국민 사과라도 하고 싶다.
지금 엄마는 함께 모여 음식을 할 때면 요리할 맛이 난다고 한다. 딸들이고 남편이고 다 된 음식 간만 좀 봐달래도 누구 하나 속 시원히 나서질 않았단다. 근데 요즘은 남편이 성실한 엄마의 간잽이다. ‘우와우와’ 하며 더 달라고 입을 쫙쫙 벌려대니 자꾸 해 먹이고 싶단다. 다른 것이 효도인가? 나의 지난 과오까지 소급하여 대신하는 모습이 알천 같은 내 반쪽이지 싶다.
연애할 때 남편을 만나 함께 밥을 먹으며 깜짝 놀랐다. 180cm가 훌쩍 넘는 키에 덩치는 좀 있어도 전혀 살집이 있는 몸매는 아닌 사람이 먹는 것은 소처럼 먹어댔다. 앉은 자리에서 공깃밥 서너 그릇은 기본이고 그마저도 수저를 내려놓으며 아쉬움이 뚝뚝 흐른다. 입을 못 다무는 내게 곁들이는 말이 더 가관이다. 군대 있을 때, 라면 열여섯 봉지를 혼자 먹은 일부터 소싯적 단골 밥집에 가면 공깃밥 여덟 그릇에 밑반찬을 여섯 번이나 리필해 먹은 사연을 늘어놓는다. 식당서 안 쫓겨났냐는 나의 물음에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거들먹대기까지 한다. 왜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을까?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오랜 자취생활로 바깥 밥을 오래 먹어,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안 차려나? 결혼하면 맛있고 건강한 집밥 많이 챙겨 줘야지 다짐했다. 깊은 마음은 언젠가는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내 밥을 10년 먹은 남편은 이제 뱃구레가 줄어 한 공기면 끽한다. 마음속 허기도 든든하게 채워진 것이리라.
아이를 키우면서도 먹는 것에 정성을 들이고 싶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맛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기본을 먼저 알길 바랐다. 자연에서 나는 재료의 맛을 알 수 있게 이유식도 열심히 만들고, 간식으로 먹는 튀밥도 집에서 쌀을 가져다가 내 눈앞에서 사카린 없이 튀겨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먹였다. 두 돌까진 과자 없이 직접 만든 간식으로 키웠다. 주변에서 별나다 혀를 내둘러도 흔들릴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자라고부터는 원하는 것은 알아서 먹게 했지만, 어려서부터 길든 입맛 때문인지 과자도 음료수도 많이 먹지 못한다. 지금은 가리는 것 없는 아재 입맛에, 어딜 가나 먹는 모습만으로도 시선을 집중시키는 아이를 보면 흐뭇하다. 밥 한술, 간식 하나에 엄마 손을 떠나서도 건강히 지내길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담겨 있었음은 몰라주어도 상관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만드는 정성이든, 찾아가는 발품이든. 인생 또한 그럴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이 내 입에 꼭 맞기를 바라는 욕심은 없다. 그래도 맛있는 인생을 위한 노력은 해보고 싶다. 인생아, 맛있어져라! /김세지(evesj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