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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재원 마을 활동가·구미시생활공감정책참여단 대표·선주문학회 회장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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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 무너진 우리 사회. 그러나 강신주만은 무너지지 않은 것으로 믿고 있다. 적어도 자신의 삶과 메시지가 어긋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도 그렇고, 대중에게 중간자로서 존재하고 싶어 하는 자세도 그러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강신주 덕분에 일상과 철학이 밀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래전엔 강신주의 책을 읽고 머리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발을 근질거리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묻어난다. 생활인의 철학인 듯한 강신주의 얘기는 매사를 스콜라적인 문제로부터 실천을 끌어내려 한다.
철학자는 일상에서 이기적인 자아와 싸울 것을 명한다. 그것도 온 힘을 다해 말함으로써 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래서 반드시 이기적인 내면의 자아를 용서치 않으리라는 다짐을 받으려는 듯 북카페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강조한다. 목소리는 여전했다. 왜소해진 체구가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그날 북카페 ‘틈’에서 철학자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온전히 살려내고 있었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을 바탕으로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은 살아있는 황금률같은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다닌다. 물론 예전보다야 인문학에 대한 열기도 식었고, 코로나로 인해 모임이 제재를 받긴 하지만 그래도 ‘저명 인사의 괜찮은 이야기’를 듣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고, 인문학에 대한 갈증 때문인지 명강에 대한 열망도 그대로 인 것 같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바르게 살진 못해도 바르게 살라는 명제엔 수긍하고, 무조건 사랑하란 말을 실천하지는 못해도 듣는 순간엔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들이라니, 이만하면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은가.
강의 말미에 평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시대의 문제점을 총망라한 그러면서 이겨나갈 힘을 잔뜩 쥐여주는 강의를 듣고도 사람들은 다만 그때뿐이다. 무슨 강의든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사람들이 달라지지 않는다. 철학과 분리된, 철저히 나눠진 이기적 삶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가. 이에 강신주는 철학자의 역할을 얘기한다. 끓어오르는 의지를 가지고 이기적 자아와 싸우라. 싸움은 자기 자신이 해야지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다. 강의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라. 자신을 찾게 되는 기회로 여겨야지 내가 제시한 방식대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철학자는 다만 넘어진 사람에게 넘어졌다고 얘기해 줄 뿐이다.
또 다른 청중의 질문에 답하면서, 삶의 방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내 집과 시댁을 오갈 때 변하는 태도에 대해 무게 없음을 지적한다. 얘긴즉슨 사랑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삶의 방향성을 잃었노라 하면서, 사랑은 아끼는 것이고 아끼는 것은 부리지 않는 것이고 부리지 않는 것은 쓰지 않는 것이라 했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합리적이고 이득에 따라 움직이므로 애지중지하지 못하고 늘 흔들린다는 것이다. 맞다. 사랑을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하다니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에 깊이 착색된 결과임을 몰랐을 뿐이다. 아무 일도 안 한다고 반려견을 버리지 않듯, 사랑하는 사람이 일을 안 한다고 버릴 수 없는 노릇이니 사랑은 합리성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사랑을 잘 모르는 어른들이 아이들 미래까지 흔들어대기에 철학자의 걱정은 크다. 이익이 되어야 움직이고 이익만 좇아다니며, 공리(功利)적인 일은 도덕적인 잣대로 보지 않거나 그 효용성을 깎아내리길 거부하는 어른들이 바라보는 미래가 어찌 밝을 수 있겠는가. 자존감이 없어 화를 내야 할 때도 웃고, 모멸감을 주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을 적극 신봉하기에 한없이 약해지는 어른들이 쥐고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그래서 경쟁만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 자중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들의 행동을 경솔하게 판단하는데, 멀리 보고 결정하는 법이 없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 역시 당장 눈앞의 성과나 결과에 매몰되기 쉽고 세상을 멀리 보는 법을 배울 기회는 결코 얻지 못한다.
몇 가지 질문을 받은 다음 책에 사인을 해 주고 철학자는 떠났다. 해봤자 안될 게 뻔한 일들이 비일비재한 세상에 청중들만 남겨 놓았는데, 그들은 막 힘든 일을 끝낸 것처럼 모두가 밝은 얼굴들이다. 결코 건너지 못할 줄 알았던 강을 건너와 다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다. 조금 전에 숨죽이며 들었던 엄숙한 사랑의 정의와 실천의 외침은 까마득해져 벌써 며칠 전의 일처럼 잊혀진 것일까. 수학적이고도 정확한 기브 앤 테이크 방식에 따라 한 공기의 사랑을 측정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발동되었는데도 나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