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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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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오태동에서 태어난 창랑은 7살부터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13살 때에는 사서삼경은 물론이요, 중국역사와 당송 8대가, 중국 인근과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역사까지 통독하였는데, 그래서 향리의 어른들로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을사년인 1905년 창랑은 13살이 되었는데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해당된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었으니 29년 만에 창랑은 개화와 근대화에 대해서 처음 만나게 되었고, 소년 장택상은 이를 적극 수용하게 된다. 13살 되던 해 창랑은 같은 성씨에 조카뻘이지만 나이는 연장자인 태화(太和)라는 인물로부터 중국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1858~ 1927), 임공(任公)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1873~ 1929)
선생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어보고서 비로소 우리 조국의 개화와 변법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개화를 직접 보고 호흡하려는 뜨거운 열망을 품게 되었다.
1904년 2월 러시아와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전쟁에 돌입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경부선 완공을 서두르기 시작하였고, 철도 완공을 앞당기기 위하여 경부선 부설에 필요한 자재를 작은 기선에 실어 부산에서 왜관까지 운반하였다. 비록 소형 기선이지만 낙동강에 기선이 처음 등장한 것이다. 마침내 경부선이 완공되어 1904년 말에 시험운행을 하더니 1905년 1월 1일 마침내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왜관과 금오산의 부상에 정거장이 세워졌고, 개화를 받아들인 근대의 선각자들과 부자와 상인들이 문명의 이기(利器)인 기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1905년 7월 15일
구미 출신으로 황성신문 사장겸 주필 장지연(1864~1921)선생이 일본을 시찰하기 위하여 경부선 기차를 타고 출국 길에 올랐다.
1905년 7월 19일
반일(反日) 정치인으로 몰린 왕산 허위 선생이 일본헌병사령부에 연금되었다가 결국 경부선 열차에 실려 강제 귀향되었다.
두 건의 경부선 관련 기사는 모두 황성신문 7월 15일과 7월 21일에 기사로 실려 있다.
◎社長 東游
本社 社長 張志淵氏가 日本에 游覽次로 今番 視察 一行과 共히
本日 京釜鉄道
第二列車를 從하야
登程하얏더라
본사 사장 장지연씨가 ㅡㅡ 경부선 기차를 타고 출발길에 올랐더라.
●許氏 歸鄕
前 參贊 許蔿氏가 再昨日 上午 九時에 京釜鉄道 第二車를 搭乘하고 善山 鄕第로 下去하얏더라
전 참찬 허위 씨가 ㅡㅡ
경부선 기차를 타고 선산 고향집으로 내려왔다.
위암 선생은 2달에 걸쳐 근대의 문물과 여러 신문사를 두루 돌아보는 일본 시찰을 마치고 9월 15일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광개토대왕 비문의 탁본을 구한 장지연은 이를 황성신문에 몇회에 걸쳐 역사학자로서 자신의 고증과 함께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11월 20일
위암 장지연 선생의 너무나도 유명한 오늘 목놓아 우노라
ㅡ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ㅡ는 제목의 논설이 황성신문에 실렸다.
ㅡ(전략)
아아,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라는 자들은 영화와 이익을 바라고 위협에 겁먹어 뒷걸음쳐 머뭇거리고 곱송그려 벌벌 떨며 매국의 도적이기를 감수하였던 것이다. 아아, 사천 년의 강토와 오백 년의 사직을 타인에게 받들어 바치고 이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타인의 노예로 몰아넣었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족히 깊게 꾸짖을 것도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대신인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 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명예 구함을 꾀하였던가. 김청음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하였고, 정동계처럼 할복도 못하여 그저 목숨만 건진채 고쳐 썼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고쳐 뵈며 그 무슨 면목으로 이천만 동포를 고쳐 보리오.
아아, 원통한지고! 아아, 분한지고! 우리 이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사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장지연의 이 논설은 조선 전역에 걸쳐 경천동지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황성신문을 통하여 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알게된 성주와 고령의 독립운동가 곽종석, 이승희, 장석영을 비롯한 선비들 역시 기차를 타고 귀경길에 올랐다. 을사 5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고종 임금께 전하기 위해서였다.
창랑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진출하려는 열망으로 가슴이 용암처럼 들끓는 1905년 오태동에도 황성신문이 배달되고 있었다. 황성신문에 실린 오대양 육대주의 소식은 근대를 직접 호흡하겠다는 소년 장택상의 뜨거운 열망을 더는 참지 못할 정도로 극단까지 자극하였다.
1906년 봄 결심을 굳힌 창랑은 더 넓은 세상을 직접 보고 근대식 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비슷한 시기에 상모동에 살았던 위암 장지연의 세 아들도 아버지와 함께 상경길에 올랐다. 1907년 위암 선생의 둘째 아들 장재철은 중국의 상해로, 창랑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의 동경에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 창랑은 1911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영국에 도착하였다.
1913년 에딘버러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올해는 그로부터 120년 뒤의 을사년이다. 작년 12월 3일의 비상계엄 소동으로 새해 초부터 전국 곳곳이 시끄럽기 짝이 없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의례 따르는 법이고, 겨울이 지나면 봄은 반드시 오는 법이다.
오늘은 새해를 맞아 신년 덕담으로 끝을 맺는다. 을사년은 만사형통 하시라. 을사년은 축복이 강물처럼 흘러넘치시라. 끝으로 부디 국태민안의 을사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