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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사찰(7)]선산부의 거찰(巨刹) 대둔사가 천하의 요새였다는데...

안정분 기자 / 입력 : 2021년 01월 22일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복우산 중턱에 위치
대둔사가 보유한 문화재 역사적, 미술사적 의미 커
구미·선산 지역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곳으로 일찍부터 신라불교 초전법륜지로 주목되어 왔다. 그래서인지 지역에는 크고 작은 절터와 석탑, 불상, 석등 등 통일신라는 물론이고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많은 불교유적과 유물을 볼 수 있다. 한 지역에서 이렇듯 조밀한 불교유적의 분포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드문 경우다. 본지에서는 신라 불교가 전래된 성지로서 구미·선산 불교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역사를 간직한,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는 사찰을 둘러본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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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문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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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의회가 2021년도 예산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사찰의 문화재 보존·관리를 위한 예산안을 두고 일부 시의원들이 특혜성 예산이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연말 대둔사를 찾았다.

구미에서 25번 국도를 타고 40분쯤 달려 낙단대교에 이르렀을 때 하마터면 차를 돌릴 뻔했다. 상주와 구미의 경계에 있는 복우산 중턱에 대둔사가 위치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소가 누워있는 형상의 산이라고 해서 이름 지워진 복우산(伏牛山)은 상주시 낙동면 신오리와 구미시 옥성면 산초리, 옥관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대둔사가 있는 복우산 일원은 현재 행정구역상 구미시에 속하지만 삼국시대에는 상주에 해당했다. 상주 사람들 중에는 대둔사를 소풍갔던 추억의 장소로 기억하기도 했다. 

ⓒ 경북문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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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깊은 고즈넉한 산사...천하의 요새

대둔사(大芚寺에)에 들어서면 멀리 낙동강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조선시대 천하의 요새였다는 말을 절로 실감할 수는 지형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 옛날엔 천하의 요새였다지만 산 속 깊은 산사 특유의 고즈넉함과 아늑함이 느껴진다.

사찰에 들어서면 맨 먼저 통과하는 문이 일주문인데 대둔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불탑도 보이지 않는다. 호국사찰의 특징 중 하나라고  주지 스님은 설명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찰 중에는 일주문이 없는 사찰들이 많지 않은가. 대둔사 또한 조선시대 중창되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지형적으로도 일주문을 세우기에 마땅치 않았을 수도 있었을 터.

대둔사는 446년(눌지왕 30)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문 기와편과 경내에 남아 있는 석등의 하대석으로 미뤄 통일신라기에 창건되고 통일신라 후기까지 사맥이 유지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창건 이후 1231년(고종 18) 몽고족의 침략으로 소실된 후 제25대 충렬왕(재위기간 1274~1308)때 왕자 왕소군(王昭君)이 출가해 중창했다고 전한다. 그 후 1606년(선조 39)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이 중건해 승군을 주둔시킨 일이 있는데 산내 암자가 10여 개소에 이르렀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들의 명확한 근거는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곳 선산이 일본군이 직접 주둔했으며 그 결과 이곳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최현(1563~1640) 선생이 쓴 선산읍지 『일선지』에 ‘大芚寺在芚山北(대둔사재둔산북)’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전반까지 대둔사는 대둔산 북쪽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후기 대표적인 관찬 군현지도인 『해동지도』 의 선산부(1750년 초)와 지방지도 선산부(1872년) 등 고지도에 대둔사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경북문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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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점 외에도 불교문화재 다량 보유

대둔사는 대웅전을 바라봤을 때 왼쪽으로는 요사채, 오른쪽으로는 명부전과 응진전이 남아 있다. 대웅전, 건칠아미타여래좌상, 삼장보살도 등 보물 3점 외에도 25점의 불교조각과 13점의 불교회화, 8점의 불교 공예를 비롯해 모두 265건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웅전(보물 제1945호, 2017년 지정)이다. 전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다포(多包)계 건물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정면의 가운데 꽃살 여닫이문과 단청의 문양에서 고전미가 그대로 느껴진다. 건물의 건립연대는 지붕을 받치는 공포나 대웅전 안의 우물천장, 단청 등을 통해 17~18세기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대웅전의 편액은 건물보다 훨씬 후대인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을 몇 바퀴 돌았을까. 처음에는 구조물을 감상하면서, 두 번째는 단청을, 세 번째는 벽면에 그려진 그림을, 마지막은 주변 환경을 보았다. 보아도보아도 새롭고 질리지 않는다.

대웅전 안에 봉안된 주존인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63호, 2010년 지정)은 대둔사 유물 가운데 가장 먼저 보물이 됐다. 건칠불상은 먼저 흙으로 기본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삼베와 옻칠을 여러 차례 반복해 도포하는 기법으로 제작한 불상을 일컫는다. 건칠은 옻이 고가이며 제작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일단 제작하고 나면 상이 가벼워 비상시에 이동하기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 열, 물, 벌레에 잘 견디며, 내구성이 강하며 섬세한 표현이 가능해 선호되기도 했다. 대체로 고려후기-조선전기라는 특정 시기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
금박을 입힌 건칠 불상은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어 마치 중생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발제선(髮際線)과 눈썹, 입가의 수염은 녹색으로 채색되어있으며 머리와 비교하면 어깨가 좁은 편이지만 양 무릎의 너비가 넓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최근 정밀실측조사를 통해 상호와 불신은 건칠로 제작되고 양손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학자에 따라 고려후기 혹은 조선 전기에 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정밀실측조사와 불상의 조각양식 등을 고려후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불화인 삼장보살도(보물 제2025, 2019년 지정)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가림막을 쳐서 볼 수 없어 좀 아쉬웠다.

ⓒ 경북문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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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안에는 이외에도 지난해 12월 31일 보물로 지정 예고된 경장(經欌 경전을 넣어두는 장)이 있다. 경장 뒷면에 쓰인 명문을 통해 인조 8년(1630)에 제작한 사실을 알려주는 불교목공예품으로 제작 시기뿐만 아니라 제작자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례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 목공예품 중 제작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대둔사의 경장은 좌측 경장의 뒷면과 밑면에 제작 시기와 제작자, 용도 등을 두루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후기 목공예 연구에 기준이 되는 등 미술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아울러 규모가 크고 조형적으로 우수해 조선후기 불교목공예의 편년과 도상연구의 기준이 될 수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평가다. 좌우 경장의 문짝 안쪽에 각각 2구씩 그려진 사천왕상 배치를 통해 원래부터 한 쌍으로 제작되어 대웅전의 불단 좌우에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수리되고 개채된 부분은 있지만 제작 당시의 문양과 채색 기법을 대부분 상실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 당시의 채색기법 연구 및 선묘불화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사천왕도는 17세기 선묘불화의 유일한 사례로 주목된다.

대둔사는 그야말로 불교문화재의 보고다. 날이 어두워져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대와 독특한 상호로 유명한 응진전의 소조석가삼존상, 삼성각 등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참고문헌>
『일선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구미시지』
구미 대둔사 대웅전 정밀실측조사 보고서(2020)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보고서(2019)
임영애, 「구미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2019)
정영호, 「선산지구 고적조사보고서」(1968)
박인호, 「임진왜란기 구미 지역의 사족 동향과 의병활동」(2016)



안정분 기자 / 입력 : 2021년 0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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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
잊혀지면 안되는 소중한 역사입니다.. 향토사를 새롭게 정립하고 바르게 세워나가시는 발걸음에 큰 응원과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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