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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 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추진단 코디네이터⋅선주문학회 고문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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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나선다는 말을 우리는 심심찮게 입에 올린다. 그런데 이는 거의 수사적일 뿐이어서 때로는 듣기가 민망스럽기도 하다. 예전에는 어른들의 모임에서 이런저런 말을 듣고 거기서 옳고 그른 기준을 찾아 내기도 했다. 논밭의 일이나 가업의 심부름을 통해 작물의 성장을 알 수 있었고, 스스로의 역할을 가늠하는 법도 배웠다. 마을이나 지역의 인물에 대해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 외의 얘기를 들으면 은근히 자부심도 생기는 것이었다. 더구나 마을의 크고 작은 경조사에 따라가 음식으로 배만 불리는 게 아니라 ‘관계로 묶여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기억하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오늘날 마을에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상호작용이 얼마나 일어나고 있는가.
‘학교 교육이 위기’란 말도 하나의 상투적인 언어로 굳어져 가는 느낌이다. 위기의 요인이 한 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지방에 있는 학교의 역할이란 고작 ‘잘 가르쳐 대도시로, 서울로’ 보내는 데 있다 보니 인구의 감소를 부추기는 첨병이 되어 교육의 위기를 넘어 지방 존립의 위기에까지 확장된다. 읍면지역의 학교는 작아지는 과정을 거쳐 폐교로 이어지곤 하는데, 근래에는 이러한 현상을 거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인구가 줄어드니까 학교가 없어지는 것을 교육부에서는 ‘폐교정보’라는 이름으로 지방교육재정알리미에 실어놓고 있다. 마을 인구가 감소하고 지역의 인구가 줄면 학교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일을 자연스레 여기고 그 수치를 공유하는 일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당장엔 읍면지역의 문제라고 치부할지 모르겠지만, 구미의 인구감소는 지금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금번 경북문화신문에서는 유치원과 초등생 대상으로 열일곱 번째의 예술제를 개최했다. 이 예술제는 여느 대회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유치원생도 대상이 된다는 점이 그렇거니와 그보다는 학교나 학원이 아닌 또다른 공간에서 서로 관계 맺는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작품 응모 후 두 번이나 자신의 얘기를 풀어낼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다. 1차 작품 심사 후 2차 예심단계에선 작품을 매개로 학생과 심사자가 만나 대화를 해나간다. 말이 예심이지 정말 많은 소통이 이뤄지는데, 세 사람의 심사자와 한 학생이 만나 서로 배우고 익히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시간이기도 하다. 심사자들은 하나같이 어린이를 잘 아는 문학가를 자처하지만, 어린이들이 풀어놓는 생생한 느낌이나 판단에 깜짝깜짝 놀라거나 깊이 감동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유치원이나 학교 안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모르는 어른들과의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다.
학교는 더 이상 우수학생, 엘리트를 길러 대도시로 내보내는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교사들만 하는 교육을 해서도 안 된다. 나름의 개성과 능력을 가진 학생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운 장소가 되어야 하고, 학교 바깥으로 나와 다양한 세대와 삶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을 바탕으로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하고, 세계적인 문제를 지역에서 해결할 방법을 찾고, 지역에서 지속가능한 문명을 만들어내도록 해야 한다. 이는 뜬금없는 주장이 아니라 이미 여러 곳에서 실험을 하고 실제 행해지고 있는 일들이기도 하다.
학교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아이들을 구미에서 잘 살아가게 하려면, 아이들에게 지역사회에서의 긍정적 존재감을 키워주어야 한다. 즉 학교 밖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신뢰를 쌓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공부와 실제 생활의 괴리를 지역사회에서 메꾸어 주어야 한다. 학교에서의 진로교육이란 직업의 의미로 매우 협소하게 다루어진다. 스스로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키워 자신의 꿈으로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격려하기보다, 물물교환에 한정된 세계관 속에서 직업과 꿈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교사 역시 학교 밖 사회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지역사회가 나서서 ‘삶교육’-지역사회의 발견, 정체성, 같이 살아도 괜찮다는 믿음-을 제공해야 한다.
예심 때 제자리로 가지 않고 곧장 우리에게 다가온 어린이가 있었다. 거리낌이 없다. 뭐 어떤가. 한 어린이는 자신이 쓴 제목이 아니라고, 엄마가 바꾸었다고 또렷이 말한다. 어른들은 어린이들과 똑같이 사물을 바라보지만, 어린이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 모두가 행복할 자격이 있는 아이들이다. 구미에서 태어난 소중한 아이들이 구미에서 자라고, 자신의 마을에서 일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마을을 만드는 것은 오직 우리의 ‘생각’에 달려있을 뿐이다.
지역의 더 많은 어린이들이 경북문화신문의 어린인예술제를 통해 세상과의 새로운 만남을 넓혀가길 기대해 봅니다.
11/27 14:06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