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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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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3월 28일 금오산 입구에 있는 “구미성리학역사관”에서 창랑 장택상 전기 출판기념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이다. 지난해 9월 창랑 선생의 컬렉션 전시에 이어 구미에서 창랑의 역사가 차근차근 소개되고 있어서 반갑기 그지없다. 창랑 장택상은 영남을 대표하는 대부호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청년기에 일본과 중국, 러시아를 거쳐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교를 수학하였고, 1920년까지 영국을 중심으로 프랑스, 스위스. 독일, 미국을 두루 둘러보며 국제적 감각을 익힌 뛰어난 경력의 선각자이다.
창랑이 수학한 에든버러 대학교는 영어권에서 여섯 번째로 오래된 대학교로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시절부터 영국의 지적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이로 인해 에든버러 시(市)는 '북부의 아테네'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으며,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기금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 수상 3명과 한국의 윤보선(尹潽善, 1897~1990)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내외 정부 수반 9명과 노벨상 수상자 19명을 배출하였다.
창랑 장택상은 1905년 열세 살의 나이에 중국의 선각자 캉유웨이(康有爲,1858~ 1927)와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의 저서를 통해 개화와 근대를 받아들이고 그들처럼 유럽을 직접 확인하는 10년이 넘는 유학길에 뛰어들었다. 창랑의 외유는 1906년부터 1920년까지 10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창랑이 청년기에 이룬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 유학을 비롯한 외국에서의 생활은 그의 남다른 기개(氣槪)와 더불어 할아버지 유헌 장석룡(張錫龍, 1823~1907)과 아버지 운정 장승원(張承遠, 1853~1917) 양대에 걸쳐 이룬 창랑 집안의 엄청난 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창랑의 집안은 구미시와 영남의 전역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이 집안의 땅을 밟지 않고 갈 수 없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올 정도로 개항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한강 이남의 대부호로 대지주로 오랜 명성을 누려 왔다. 그렇다면 창랑 집안은 실제 어느 정도의 부자였을까. 창랑 집안의 부(富)에 대해서는 매일경제 1982년 12월 3일 《재계 산맥, 근세 100년 산업과 인물<453>》에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지방 토호의 대표 격인 장승원 집안에 대한 기록을 보면 장석룡― 장승원― 장길상으로 3대가 이어졌는데, 일제 강점기의 초기에 상당 기간 대구에 거주했던 「조선 대구 일반」의 저자 “미와 조테츠(三輪如鐵)가 장승원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라면서 인용한 기술(記述)을 보면 <인동군 장승원 씨는 1905년 봄 3천 8백 마리의 밭갈이 소로는 좀 부족하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한 마리의 밭갈이 소는 논 2정보를 갈 수 있다. 그의 전답은 강원 충청 경상의 3도에 걸쳐있다>
장승원 일가가 낙동강을 끼고 3도에 땅을 넓혔다는 이야기는 수운을 끼고 있으니 타곳 지주보다 땅을 넓히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3백 평을 한 마지기로 따져 7만 6천마지기, 1 마지기에 소작료 1 섬을 받았다 하더라도 7만 6천 석의 추수를 했다는 이야기다. 좀 과장된 이야기다. 아무리 수운을 끼고 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방대한 땅을 관리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이다.(이상 매일경제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