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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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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시절의 선비들이 주로 구독한 황성신문에는 서양세력의 침략으로 갈기갈기 찢기고 있는 아시아의 실상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인도는 일찍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가까운 버어마와 네팔도 영국의 식민지였다. 스리랑카와 인도네시아는 네델란드의 식민지였고, 라오스와 캄보디아,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였다. 가장 처참한 처지로 떨어진 나라는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의 운남성 일대는 프랑스가 진출하였으며, 상하이와 홍콩은 영국이 점령하였고, 교주만 일대는 독일이 점령하였다. 만주와 중국의 북방은 러시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며, 미국도 슬금슬금 중국의 각 도시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었다.
또한 황성신문에는 유럽의 산업혁명을 개척한 초기 발명품인 방적기(紡績機)와 증기기관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기선의 발명과 신항로의 개척과 세계 각지에서 활발하게 추진되는 철도 부설과 자동차의 발명에 대한 소식을 상세하게 전달하는가 하면, 영국을 주도로 아시아와 세계의 각지를 향하여 뻗어가고 있는 전선(電線)과 전화, 전보를 비롯하여 서양의 신문물에 대한 정보와 동향을 빠짐없이 보도하였다.
20세기 초에 접어들자 선진국의 국방력은 해군의 증강을 중심으로 판별되었는데, 황성신문의 외보(外報))에는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을 비롯하여 미국, 프랑스, 독일의 해군 정책의 내용과 신년(新年) 계획이 그때마다 기사로 채택되고 있다. 이밖에도 황성신문은 식민지 쟁탈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비행기의 발명을 전쟁에 활용하려는 유럽 선진국들 사이의 과열된 경쟁에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있었다.
이처럼 황성신문을 통해 세계의 격동하는 소식을 접한 소년 장택상은 가까운 중국과 일본은 물론 유럽과 미국의 근대문물을 직접 호흡하겠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고, 1906년 서울 유학을 거쳐 1907년 일본으로 떠나는 유학길의 장도(長途)에 올랐다. 창랑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895년부터 개항장에서의 무역과 통상으로 한정되었던 서양 제품들이 내륙지방인 경북에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개항 초기에 조선으로 들어오는 상품의 88%는 영국제 옥양목 등 면포(綿布)를 중심으로 한 외국제 상품이었다. 처음 일본 상인들은 1888년 영국 상회로부터 생옥양목을 직접 수입하여 삼각무역으로 이를 조선에 수출했지만 1894년 이후에 접어들면서 일본제 생옥양목을 수입하는 것으로 전환하여 영국 면포와의 경쟁에서도 승리하였다. 이러한 개항장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의 실제 상황은 황성신문에 여러 번 소개되고 있으며, 가끔 사설로 이를 다루기도 하였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러시아와 멕시코, 중국, 베트남, 인도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는 농민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유럽과 러시아, 중남미에는 석탄과 철을 캐는 광부들과 철도노동자들과 전 세계의 공장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의 동맹파업과 격렬한 시위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성신문은 외보를 통하여 농민들의 반란과 노동자들의 동맹파업, 유럽과 아시아 각국에서 활동하는 혁명당의 소식이 여과 없이 보도되고 있다. 다음은 러시아와 멕시코의 농민 반란과 영국 광부들의 동맹파업에 관한 기사이다.
農民의 叛亂
皇城新聞 1906년 8월 9일 1면 5단
同電을 據 則 俄國 기니후、사마라 地方에셔 農民이 叛亂을 起야 泒送된 軍隊를 擊破얏더라.
墨西哥의 叛亂
皇城新聞 1906년 10월 5일 1면 6단
桑港 電을 據 則 墨西哥의 8個 州에셔 重大 叛亂이 起하야 漸次 蔓延하 故로 大統領이 各 軍隊 司令官에게 命令을 發하야 速히 叛徒를 鎭壓케하고 該 叛亂에 關係가 有 高等官吏와 嫌疑者를 捕縛하얏다더라
英國罷工 瀰蔓
皇城新聞 1909년 7월 16일 1면 4단
格蘭 밋드란드 地方의 炭坑夫同盟罷業은 北部 全地에 蔓延고 又 坑夫 3萬人을 有 스팰드 鑛山과 其他 鉄工場 及 陶器製造所 等도 休業얏다더라. (번역: 영국 동맹파업 만연―스코틀랜드 미들랜드 지방의 탄광부 동맹파업은 북부 모든 지역에 만연하고, 또 갱부 3만 인이 있는 스랏팰드 광산과 기타 철공장 및 도자기 제조소 등의 노동자들도 휴업하였더라)
1904년 아버지 장승원이 경북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시작하자 일제 당국은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경부선의 개통을 서둘렀다. 마침내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자 일본인들의 내륙 진출은 더욱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1907년 말이 되자 대구와 경북의 전역으로 비록 적은 수이지만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전답과 주택을 구입하고 거주를 시작하였다. 구미와 인동에도 일본인들이 진출하였다.
1908년 15세에 일본으로 유학, 8개월간 일본어 공부를 하다가 야마구치현에 있는 소학교로 입학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도쿄 조선 공사관에서 파견한 시학관(視學官)이 훈시 중 안중근의 의거를 모독하는 발언을 하자, 장택상이 그것은 의병 행위이지 어떻게 폭도행위인가 하며 규탄하였고, 한인 학생들은 연단에 올라가 시학관을 끌어내리는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910년 10월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였다. 다른 누군가에게 속박당하는 것을 불쾌히 여긴 창랑은 “일본인들의 통제와 발굽 밑에 살아갈 수 있는 내 기질이 아니라”는 각오를 굳히고 11월 망명을 결심하였다. 첫 행선지는 중국의 상하이였다. 다른 사람의 여권으로 상하이에서 도착한 창랑은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여권과 비자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11년 1월 17일 창랑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러시아에서의 첫 입항은 순식간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일단의 청년들에게 납치되어 일촉즉발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경우 연해주의 민족 지도자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을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 장승원의 벗이었던 이상설의 추천으로 러시아의 호텔에서 투숙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전이 보장되었다. 이상설의 권유와 주선으로 그는 망명지로는 영국으로 결정되었다. 망명지가 확정되자 이상설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갑(李甲, 1877~1917)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와 추천장, 여비를 주어 페테르부르크로 보냈다.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에서 이갑과 안병찬(安秉瓚, 1854~1921)을 만나 2개월간 함께 지내며 특히 이갑의 투지와 항일투쟁에 깊은 강명을 받았다. 이갑과 안병찬은 모두 당대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헌신적인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러시아를 거쳐 독일에 도착한 창랑은 현지에서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선생을 만나 짧은 기간이지만 유학 생활에 필요한 조언을 듣고 조선 청년의 사명에 대해 직접 지도를 받는 남다른 인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1911년 화창한 어느 봄날, 창랑은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영국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