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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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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지도자 박정희 약전
국민보 1961-11-22 WEDNESDAY
국민보 제三千五百七十七호
서울역에서 경부선을 타고 수원, 천안, 대전을 지나 경상북도 땅에 들어서 대전과 대구 중간되는 곳에 [김천]역이 있다. 이 김천역에서 서너 정거장 더 가 [구미]라는 역에서 내리면 서쪽에 금오산이 세차게 날개를 뻗치고 우뚝 솟아 있으며, 이 금오산 기슭에 九○여 호의 농가가 옹기종기 등을 기대고 사는 [상모]라는 촌락이 있다. 지난날에는 [부지동]또는 [모로동]이라고도 불렀다는데 [모르겠다]라는 어원에서 나왔다고 한다더라. 옛 노인들이 (운심부지처)라 용이 있기는 있는데 구름이 깊어 갈 수 없다 하여 이렇게 동리 명을 불렀다는 것이다.
六, 二五 전쟁 전만 하더라도 (운심루)라는 누각이 있어 글 하는 노인들의 모임터가 되어왔다고 한다. 금오산은 일찍이 명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구미) 서쪽에 불끈 솟은 산 속에 거세게 남으로 뻗쳐 문필봉, 열녀봉, 효자봉을 이루고 있다. 상모리는 바로 효자봉 메뿌리가 흘러내린 기슭에 부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씨가 태어난 생가는 바로 이 부락 막다른 골목에 위치한다. 금오산의 주령이 필경 이곳인 모양이라. 동리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뒷산에 오르면 금오산 줄기가 안고 돌아갔으며 앞에는 멀리 낙동강이 구비쳐 흐르고 그 저쪽엔 태백산맥이 줄기차게 뻗고 있다. 산수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상불묘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一八九四년 동학란이 일어나 세상이 어지럽고 一九一○년 한일합방이 있은 지 十二 년 되는 해이다. 동학란이 경상도를 휩쓸었을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무과 벼슬을 받아 영월군수를 지낸바 있는 박성빈씨를 엄친으로 자당 백남의씨는 단산한 줄 알았던 터에 배가 불러 이웃이 창피타 하여 배 안의 아이를 떨구고자 간장 두 종기를 마셨으나 끝내 낳게 되었다는 막내둥이다. 실상 떨구고자 했던 아이가 낳고 본즉 막내둥인 관계도 있었겠지만 굉장히 정을 쏟더라는 것이다. 즉, 기미년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전전해인 一九一七년에 났으며 당시 엄친의 나이는 五四세요. 자당의 나이는 四四세였다.
엄친 박성빈씨는 산기슭의 건답 여덟 마지기로 생계를 이루어 나가는 자작농으로 동리에는 집집마다 감나무가 한 두 그루 서 있고 농기구로 제각기 갖추고 큰 부자도 없었을 뿐더러 그렇다고 절량농가도 없던 모양이다. 상모동 어린이들은 이곳서 시오리 떨어진 구미 보통학교에 다니어야 하였다. 겨울이면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길을 푹푹 빠지며 학교 길을 재촉해야 되었다.
박정희 소년은 남보다 키가 작았으며 가냘픈 편이었다. 동리 아이들은 모두들 떼를 지어 학교까지 오고가고 하는 것이었으나 박 소년만은 혼자서 걸었다.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어린 것을 볼 때 동리사람들은 이상한 아이라고 유심히 보는 것이었다.
필요치 않은 말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말을 하면 침착하고 조리있게 어른다운 언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예 말이 없는 고독한 소년이었다고 할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할 일이 없으면 뒷산에 올라가 목검을 만들어 갖고 혼자서 나무등을 치고 칼 쓰는 흉내를 내는 것이 유일한 취미었던 것 같다. 이런 것을 보는 어머니는 [쟤는 커서 군인이 될라는가부]하고 혼잣말을 하는 것이었다.
학교성적은 맡아 놓고 일등이었고 졸업할 때까지 급장 노릇을 했다. 간혹 선생의 꾸중을 듣는 일이 있었으나 그는 표정 하나 고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는 일이 없었다. 묵묵히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대로 행동할 뿐이다.(미완)
이번에는 신문기사만 전하기로 한다. 다만 기사를 실은 국민보를 소개한다. 국민보는 1913년 8월 1일 호놀룰루(Honolulu)에서 국민회(國民會)가 발행하던 『신한국보(新韓國報)』를 게재하여 발행한 신문이다. 이 유서 깊은 신문에 상모동 출신의 박정희가 혁명지도자로 소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한국보』는 당시 하와이의 교민단체가 통합되어 결성된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1909년 2월 1일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지역의 공립협회(共立協會)와 연합단체를 구성하여 국민회로 되면서 1907년 10월 17일 창간한 그 기관지인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1909년 2월 15일 개제하여 발행한 신문이었다.
따라서, 그 후신인 『국민보』는 매호 상단에 ‘1907년 10월 17일 창간’이라는 것을 명기하였다. 체재는 타블로이드 배대판(倍大版) 4면, 7단제로 발행하였다. 처음에는 『신한국보』의 주필이었던 홍종표(洪宗杓)가 주간이었으나, 그 뒤 당시 하와이의 지도자였던 박용만(朴容萬)이 주필로서 제작에 참여하였다.
한때는 이승만(李承晩)이 그 제작의 지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승용환(承龍煥)·김현구(金鉉九) 등 많은 정치가들이 이 신문의 중요직을 담당하였다. 1946년 12월에는 백일규(白一圭)가 미국 본토로부터 와서 약 2년간 주필을 맡았다.
이 신문은 하와이에서 우리 말로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서 독립운동과 문맹퇴치 및 지식보급 등 교민의 계몽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따라서, 조국과 재미교포들의 소식을 상세히 알려 주는 보도적 기능에도 충실하였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하와이에서 영어 이외의 모든 외국어 신문의 발행이 금지되어 1941년 12월 10일 문을 닫아야 했다.
1942년 1월 21일부터 1944년 2월 2일까지의 기간에는 국민회와 이승만계열의 동지회(同志會)가 합동으로 제호를 ‘국민보-태평양주보(Korean National Herald-Pacific Weekly)’로 고쳐서 다시 발행해 오다가 1944년 2월 9일부터는 『태평양주보』와 분리하여 다시 『국민보』로 복간하는 한편, 영문 1면을 추가하였다. 이 영문면은 1945년 1월 31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문판 신문을 보려는 독자의 감소로 1968년 12월 결국 폐간하고, 그 대신 국문과 영문으로 된 『국민회회보』를 발행하여 회원에게만 배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신문사연구』(이해창, 성문각, 1971)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 캘리포니아, 1959)
「포왜한교신문사략고」(차배근, 『신문학보』 13, 1980)
(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