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김종길 시니어 기자 |
ⓒ 경북문화신문 |
|
상모사곡동 지역은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지역사회의 주민들과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에서 모립곡(謀立谷), 모립곡(毛立谷), 사곡(沙谷)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로 볼 때 이 부근은 일찍부터 모래실 또는 사곡으로 명명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면서 주로 선비들 일각에서 특히 상모동에 대해 “모르겠다”는 뜻의 부지곡(不知谷) 또는 부지동(不知洞)으로 따로 부르게 되었으며, 어느 순간 부지동은 상모동의 별칭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19세기를 전후하여 상모동은 모립곡(=모래실)의 위쪽이라 하여 상모(上謀) 또는 상모(上毛)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고, 일제에 의하여 1914년 7월 15일 구미면 상모리와 사곡리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공문서와 등기부나 토지대장을 비롯한 모든 공부(公簿)에 상모(上毛)로 표기되었다.
그러면 상모사곡동 지역에서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이에 대한 단서도 역시 조선 후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상모동에서 청장년 시기를 보낸 뛰어난 언론인이었던 위암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선생의 글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장지연 선생의 문집인 위암문집 4권에 수록된 모로동기(慕魯洞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고개의 남쪽에 불당골이 있고 불교의 흔적이 많다. 그 바깥에 선봉사(仙鳳寺)가 있는데, 어느 때에 모두 허물어졌는지 알 수 없고, 오직 부도탑과 의천비(義天碑)가 있다. 그 위는 도사현都事峴)이고, 그 서쪽에 의천굴(義天窟)이 있는데, 매우 깊고 험준하며 돌로 된 방과 돌로 된 창이 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완연하다.”
상모동에는 불당골이 있다. 또 형곡동 뒷산에도 그런 지명이 있다. 모로동기에서 위암이 보았던 상모사곡동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불교의 흔적은 고려 전기(前期)의 스님으로 불교를 크게 일으킨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선봉사(僊鳳寺)는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금오산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1132년에 세운 선봉사 대각국사비(대각국사 의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에 의해 고려 시대에 선봉사가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선봉사는 대각국사와 그 제자들이 수행했던 천태도량으로, 당시에는 현 위치보다 아래쪽에 있었으며 부지면적이 약 3만 3,000㎡(1만여 평)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조선 시대 들어 임진왜란 발발 7년째 되던 해에 왜인들에 의해 전소되어 폐사되었다.(두산백과에서 인용) 모로동기와 두산백과의 기록을 보면, 고려 시대에 창건된 선봉사는 규모가 만평에 이르는 대규모 사찰이었으며, 이런 대형 사찰에는 딸린 암자도 많았을 것이며, 암자 정도의 사찰이 형곡동 뒷산과 상모사곡동에도 많은 사찰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인재 최현(崔晛, 1563~1640)선생이 찬술한 일선지(一善志)에는 찬술 당시에 금오산에 있는 사찰에 대한 기록이 모두 나오는데, 대혈사(大穴寺), 보봉사(普峰寺), 동양사(東陽寺), 약사전(藥師殿), 전종사(全宗寺), 보제사(普濟寺)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선봉사(仙鳳寺)의 이름은 아예 보이지 않고, 형곡동이나 상모사곡동 지역에 있는 사찰 이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곡동이나 상모사곡동에는 대단한 규모의 사찰은 아니었고 거의 암자(庵子) 수준으로 짐작된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고려 중기의 어느 시기에 선봉사가 창건되면서 그에 딸린 말사(末寺)들이 형곡동, 상모사곡동, 칠곡군 북삼면 숭오동 등의 지역에 무수히 세워졌으며 조선 시대에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이 강화되면서 모두 사라졌거나, 아니면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 따라 어느 순간 바람처럼 허물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사곡 상모동 최초의 주민들은 스님들이거나 사찰에 의지하여 살았던 신도들이나 사노(寺奴)들로 보인다. 일선지에 기록된 사곡지(沙谷池)도 이들이 농사를 짓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짐작해도 좋을 것 같다. 사곡지는 1970년대 말에 이미 사라졌으나 못이 있었던 자리에 유래를 밝히는 작은 입간판이라도 세워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