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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길의 구미 근현대사]하구미 삼총사

김종길 시니어 기자 / 입력 : 2024년 07월 10일
↑↑ 김종길 시니어 기자
ⓒ 경북문화신문
1960년대 하구미에는 주목받는 삼총사가 있었다. 그들은 약관 20을 넘어 청년기에 접어들자마자 상,하구미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삼총사는 모두 1930년대 출생으로 이팔봉, 박정효, 김시구가 바로 그들이다. 이팔봉은 사곡에, 박정효는 신부동의 장동에, 김시구(金時九, 1937~ 작고)는 다송 출신이다. 

구미시지를 보니 송정, 형곡을 포함하여 위의 지역이 상구미이고, 나머지 지역은 하구미로 부르고 있다. 그들은 하구미라는 같은 지역에 나란히 이웃하여 살면서 초등, 중등을 구미에서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기를 맞아 청운의 뜻을 품고 함께 대구로 유학을 떠났다.

이팔봉과 박정효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고, 김시구는 약간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팔봉은 학비를 벌기 위해 야간 영남고등학교에 원서를 내어 당연스레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박정효는 대구사범에, 김시구는 대구농림을 거쳐 경북대학교 법정대학에 진학하였다.

박정효는 1957년에 대구사범을 졸업하여 고향인 광평초등학교에 초등교사로 부임하였다. 김시구는 1965년에 경북대 법정대학에 합격하여 1969년에 졸업하였다. 김시구가 입학한 대구농림은 1910년도에 개교하였고, 1945년 해방 직후부터 대구 경북의 행정분야에서 뚜렷한 인맥을 구축하였으며, 특히 시장, 군수 출신들이 많았다. 경북지사를 역임한 구자춘, 구미시장을 거친 정충검, 권영세 국회의원, 소설가 김주영과 김원일 등이 대구농림 출신이다.

김시구는 도로공사와 삼성전자를 거쳐 알찬 중소기업을 경영하다가 1991년 초대 구미시의원에 당선되었다. 명색 구미지역 진보운동을 대표하는 처지였던 서생은 지근거리에서 선후배들과 함께 자리하는 그런 기회도 가끔 있었지만 직접 대화를 나누지는 못 했다. 지금 보니 같은 대학의 동문이기도 했는데 생각할수록 아쉬움만 더할 뿐이다.

김시구의 부친되는 김무상(金武相, 1908~1973)도 역사적 인물이다. 일찍이 구미초등을 졸업하고 해방공간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구미면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여 1948년부터 구미면장이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1945년 10월 23일 좌 · 우익을 망라한 민족통일기관 형성을 위해 조직된 정치단체로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정치적 기반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개인을 중심으로 보면 사람의 경력을 기록으로 정리하면 그런대로 작은 역사가 되는 것이다. 영웅 호걸의 활동만이 역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생애도 기록으로 정리하면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서생은 구미시 근현대의 생생한 역사를 쓰려는 일념 하나로 2000년부터 지금까지 사람을 만나고 기록들을 정리해 왔다.

그 과정에서 민주진보의 역사는 부족하나마 만났지만 보수의 역사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가까이 10년 전부터 제헌의원 육홍균, 3대 김우동, 4대 김동석, 5대 신준원 국회의원의 기록을 접하면서 구미시 보수정치의 계보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박정희만 지나치게 숭배하다 보니 그 많은 보수정치의 역사도 기록되지 못한 것이다. 육홍균을 지지한 선산면 "비봉청년회"는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으니 마음은 더없이 조급하기만 하다.

하구미의 상모동, 사곡동, 오태동, 임은동은 구미시 근현대사의 출발점이자 구미시와 경북, 영남과 대한민국의 근현대를 이끈 뛰어난 선각자들이 태어나고 성장한 실로 역사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 선각자들의 존재는 실로 울울창창하다. 근대적 언론을 개척한 황성신문의 사장겸 주필을 역임한 위암 장지연(1864~1921), 13도 창의대진을 이끈 의병장 왕산 허위(1855~1908),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허형식(1909~1942)이 모두 이 지역 출신이다.

이외에 1920년대에 초기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오태 출신의 장병천(1903~1923)은 해방 직후 수도경찰청장에 이어 국무총리까지 두루 거친 창랑 장택상 (1893~1969)의 조카이기도 하다. 장병천은 기생 강명화의 연인으로 유명하지만 일제강점기 1920년대 초기에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독립운동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그만 알 수 없는 운명에 이끌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이다.

신간회 선산지회부터 해방공간까지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박상희(1905~1946)는 박정희 대통령의 중형이고,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1929~2015)은 박상희 선생의 장녀이다.

1919년 9월 15일 창립된 선산청년회장은 상모동 출신으로 위암 장지연의 처남인 이우철(1872~1936)이었다. 신간회 선산지회와 선산청년동맹의 주역들은 대개 구미초등학교 1회에서 7회 졸업생들이었다.
현 보수당 출신의 구자근 국회의원의 조부도 구미초등 2회 졸업생이다.

이처럼 하구미에서 근대적 변화를 이끈 동력도 마찬가지로 근대식 교육의 힘이다. 하구미에는 초기의 선각자들인 뛰어난 혁신유림들의 존재가 있었고, 1901년 세워진 상모교회가 바로 근대화 돌풍의 진원지였다. 본격적으로 지역 근대화를 이끈 온상은 1938년 개교한 구미초등학교 광평분교의 출범이었 다. 지금 하구미 각 마을의 1세대 원로들과 지도자들은 대개 광평초등학교 출신들이다.

다시 이팔봉으로 돌아가보자. 1957년에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팔봉은 고향으로 돌아와 사진사로 소일하면서 사곡동에 청년회를 만들어 청년회장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곡 마을 웃막꼴에는 마을 출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울에서 내려온 청년들이 몇 년에 걸쳐 야학을 운영하고 있었고, 밤마다 10대에서 20대에 이르는 청소년들은 밤마다 글러브를 끼고 권투를 하면서 시간을 깨고 있었다. 생활고에 짓눌린 청년들은 하나 둘씩 대구로 서울로 대처로 조용히 사라졌고, 그들이 고향에 다시 돌아오면 마을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곤 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이웃 마을의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일군의 군인들이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 때부터 구미와 선산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하루가 다르게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가 고향방문을 하는 날이면 구미역에서 상모동 생가에 이르기까지 어른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민들이 연도에 구름같이 늘어서서 박정희 일행을 환영하였다. 

하구미에서도 근대식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박정희 장군이 이룬 정치적 격동에 앞다투어 호응하였는데 전병억, 허호, 정영진, 이우익에 이르는 1930년대 생들이 중심이었다. 하구미 삼총사 역시 이러한 흐름에 뒤질세라 적극적으로 합류하였다. 

상구미와 선산면을 드나드는 과정에서 단연 지역 원로들의 주목을 받은 사람은 바로 이팔봉이었다. 대구에서 공화당 초기를 회고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당시의 구미면 원로였던 윤원조 어른이 소환되었다. 윤원조 어른은 구미면 출신이면서 민주공화당 창당의 주역인 윤천주(尹天柱, 1921~ 2001)의 부친이다.

구미면 출신이면서 본격적으로 근대를 호흡한 윤천주의 생애는 실로 역동을 넘어 한 편의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윤천주는 1921년 경북 선산군 (현 구미시) 구미면에서 태어났다.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가나자와시의 제4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했으나 8.15 광복으로 중퇴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1963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정경대학에서 1963년까지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김종필 등과 민주공화당 창당에 관여하였다. 1963년 초대 민주공화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과 관련하여 6.3 항쟁에 참여한 학생들에 대한 징계에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경질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3선 개헌 때 김종필과 친하여 개헌안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학계로 돌아갔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부산대학교 총장을,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 출신으로서는 최초의 서울대학교 총장이며 서울대학교의 전신 학교 출신 총장들까지 합하면 3번째다. 여촌야도라는 용어를 만든 장본인이다.(위키 백과에서 인용)

특유의 친화력과 남다른 정치적 감각으로 윤원조를 비롯한 구미면과 선산군 원로들의 지원을 받은 이팔봉은 군청소재지인 선산면으로 가서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선산군지회 사무처에서 근무하였다. 사무국장이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신임을 받으며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고 이팔봉은 그 시절을 회고하였다.

5·16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제2공화국 시기 범람했던 무질서, 방종,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침체된 국민 의식을 고양하자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국민 혁명’으로 만들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시도하였고, 이를 위해 전 사회 지도층이 참여하는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공화당 창당에 윤천주가 나선 것처럼 초기의 재건국민운동에도 당대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대거 합류하였다. 재건국민운동 본부장을 역임했던 유진오, 유달영, 이관구 등이 몸을 실었고, 비판적 지식인들이었던 고재욱 동아일보 주필, 장준하 사상계 사장, 홍종인 조선일보 회장 등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중앙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국가재건국민운동은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1961.6.11.)에 따라 시작되었다. 5.16세력은 재건국민운동을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고자 재건국민운동 본부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기구로 배치했다. 군사 정부는 곧바로 전국에 조직을 확대했는데, 각 중앙의 본부 이외에 각 지방의 구, 군, 읍, 면, 반 등에 전국재건청년회, 부녀회, 집단 촉진회 등을 설치하였다. 그해 11월 대학 및 중고등학교 촉진대를 해체하여 재건 학생회 1,386개를 발족시켰다. 1961년 말에는 설치된 관련 단체가 12,982개에 이르렀다. 민간운동으로 성격이 변화되면서 1964년 8월 재건국민운동 본부가 해체되었다. 이후 운동을 민간 주도의 국민운동으로 변환하기 위해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설립 · 운영되었으나 소관 업무가 내무부로 이관되면서 1975년 12월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대구에서 만난 이팔봉 선배는 1966년 12월 1일 박정희 총재 명의로 발행된 민주공화당원증을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민주공화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17년 8개월 동안 존속하여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정당이다. 지역에서 이루어진 공화당 지구당의 역사는 반드시 기록되어 비판과 반비판의 과정을 거듭할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구미시 최초의 공화주의자는 상모동에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거주하였던 위암 장지연(1864~1921)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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