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기고

김종길의 구미근현대사]사곡역 이야기(2)

김종길 시니어 기자 / 입력 : 2024년 06월 17일
ⓒ 경북문화신문
사곡 간이역 유치운동의 출발은 일제강점기때 존재했다가 해방후에 폐지되어 버린 "사곡운전간이역"의 존재였다. 정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추측해 본다면, 사곡 운전간이역은 1937년부터 시작된 경부선 복선공사 때부터 공사의 촉진과 필요한 자재운반의 편리를 도모하고, 운행시간의 단축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건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 사곡동사무소 옆의 공터 좌우로 지금은 그 흔적이 온전하게 사라졌지만 사곡운전간이역의 존재 를 입증할만한 경부선 철도 높이와 비슷하게 조성된 언덕이 있었다. 그 언덕의 양켠에는 가난한 주민들 10여 가구가 집을 짓고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사곡 운전간이역은 해방 직후 폐지되었다고 하니, 일본과 만주, 사할린으로 이주했다가 귀국한 이들이나 가난한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그 둔덕에 거처를 마련했던 모양이다. 나머지 주민들의 처지도 그다지 넉넉지 않아서 갓골에서 내려오는 사곡천이 만들어낸 모랫벌 하천부지에 집을 마련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해방 전후에 조성된 마을이라 해서 이름도 새마을 또는 "새말'이다.

사곡동 주민들은 하천부지 끝의 빈 공터에 제법 규모있는 운동장을 만들었다. 그 운동장에서 청장년들이 노소동락으로 편을 갈라 주로 배구경기를 하였다. 사곡동 주민끼리 편을 나누기도 했지만, 가끔은 사곡동 대 송정동, 광평동, 임은동의 막걸리 내기 수준의 소박한 동내 대항전이 대부분을 이루었고, 어쩌다 사곡동 대 동내연합의 대결이 성사되기도 하였다. 가뭄에 콩나듯이 선수가 모자라면 나도 배구경기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날의 승부는 거의 내 손에 달려 있었다. 운동신경이 둔한 내가 실수로 공을 몇 개 받아올리면 그날 우리 편은 무조건 이겼고, 본실력에 머물러 버리면 우리 편은 말할 것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말하자면 나는 "구멍"이었던 것이다.

새마을 주민들은 가난했지만 인정이 넘쳤다. 우리집은 갓골에 있었기에 새마을과 가까웠고, 밤이되면 가끔 나와 어머니는 함께 밤나들이에 나섰고, 어른들이 모인 사랑방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해방공간의 시기에 잘 모르고 좌익 "연판장"에 서명했다가 죽을만큼 고생한 끝에 천행으로 살아 돌아왔다는 은밀한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인정 넘치는 새마을에서의 여러 일화들은 가끔씩 내 추억의 저장고에서 소환되곤 한다. 그런데 내 어린 날의 추억이 가득찬 새마을이 구미시에서 추진한 1980년대의 새마을 주택사업으로 일부가 이주하더니, 2000년대 초에 끝난 구획정리사업으로 마을 전체가 깨끗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새마을은 갓골로 가는 초입에 해당되는데 지금 일제 때에 조성된 사곡 운전간이역의 마지막 흔적은 유일하게 이곳에 남아 있다 한 150m쯤 될까.

1960년대 초 사곡동 주민들 가운데 나이 든 고로(古老)들이 옛 기억을 되살려 진정서에 사곡 간이역 유치의 근거로 이를 진정서에 반영한 것이다. 또한 주민들은 사곡역 유치의 근거로 약목역과 구미역 사이의 거리가 약 13Km에 이르는데, 이는 경부선 전체에서 가장 먼 역간의 거리에 해당된다고 특별히 이를 강조하였다.

사곡 간이역 유치운동의 구체적 경과를 살펴보자.
1961년 6월 각동 대표 20명으로 사곡 간이역 설치 준비모임이 시작되었다. 진정서에 따르면 1961년 8월 26일 당시의 교통부장관에게 진정하였으나 당시의 회신은 지리적 조건에 부적합하다는 결론이었다. 당시의 교통부장관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만주국 군인이 되어 간도특설대 출신인 14대 박춘식
(朴春植,1921~1979)이었다.

1964년 10월 3일 37개 마을 주민대표 37명의 연명으로 16,490명이 참여한 진정서가 철도청장에게 전달되었다. 대한민국의 철도청은 1894년 6월 28일 의정부 공무아문 철도국으로 출발하여 조선총독부 철도국, 미군정 운수국, 철도국을 거치면서 교통부 산하에 있다가 1963년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철도청으로 독립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국철國鐵), 즉 국영철도의 시대가 열렸다. 1963년에서 1964년 사이의 철도청장은 초대 박형훈과 2대 김진식이다. 사곡 간이역 유치를 승인한 청장은 2대 청장이다.

1965년 8월 이팔봉 추진위원장은 철도청장을 면담하였다. 청창은 면담 즉석에서 이한규 설비담임관을 소개하였다. 대단히 긍정적인 화답이다. 3일 뒤 이한규는 사곡역 설치 장소를 현장조사하였다. 모든 일이 전광석화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65년 6월 철도청은 모든 준비를 주민자력사업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사곡 간이역 개설인가를 하였다.

이때부터 사곡역 간이역 개설을 위한 준비는 오롯이 이팔봉과 인근 주민들의 몫으로 떨어졌다. 2달 간의 준비끝에 9월부터 사곡간이역 조성공사에 돌입하였다. 우마차와 손수레, 지게와 주민들의 인력으로 10여 m의 경사진 곳을 흙으로 메워 프랫폼을 조성하였다. 승강장은 세멘트를 자재로 조달하지 못하여 잔디를 쌓아서 승강장을 만드는 대역사(大役事)였다. 연인원 2,000명이 참여하였다.

1965년 12월 10일 마침내 사곡역이 개설되었고, 상행 완행열차는 주민들과 초등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사곡역을 통과하였다.

이와 같은 사곡역 유치운동의 성공의 여러 고비마다 박정희 대통령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실제에 있어서도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사곡 간이역 유치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61년 상모동 출신의 박정희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지지군인들을 이끌고 박정희 장군은 거사에 성공하였다. 숨가쁜 5월 16일이 지난 며칠 후 사곡동과 상모동 일대의 상공으로부터 "혁명공약"이 적힌 선전물이 눈처럼 하얗게 쏟아져 내렸다. 이때부터 박정희 장군은 승승장구하였다. 1961년 5월 20일부터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 되었고, 내각 수반과 의장이 되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대장 승진과 동시에 전역.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현역 대통령의 고향마을 인근에 간이역을 설치해 달라는 민원이 왔으니, 철도청에서는 비상이 걸렸을 것이고, 유치운동은 어느 순간부터 일사천리로 풀려 나갔던 것이다.

대구에서 만난 이팗봉 선배는 이런 말로 사곡 간이역 유치운동을 회고하였다.
"어떻게든 사곡역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미친듯이 일에 메달리다 보니, 명색이 사진사인 내가 사진 한 장을 못 남겼네. 2,000 명의 사람들이 노동력을 보탰는데, 막걸리 한 잔도 대접 못하였지.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이것일세."

마지막으로 "간이역 설치에 관한 진정서"
전문을 소개한다.

존경하옵는 청장님, 복잡한 철도 업무에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청장님의 혁혁한 노고에 국민으로서 감사드립니다.
就 우민(愚民)들은 경부선 구미역 약목역 간에(중간 지점) 거주하는 철도연변의 주민입니다. 현대문명의 이기인 철도를 이용 못 하고, 시대적으로 낙후하여 철도의 혜택을 못 받고 시간적 경제적 교육상 받는 피해는 물론 지방 산물수송에 막대한 애로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상태에서 수년에 걸쳐 여론화되었던 숙원을 청장님께 진정하오니, 좌기 사항을 참조하시와 우매한 주민들의 소원을 청허(請許)해 주시옵기 간곡히 기대하오며, 지방 주민 만삼천 명은 간이역 설치 가상한 지점 선로 약도 및 리동간 집군역(集群驛)간 거리 등을 첨부하여 이에 진정하옵니다.

1.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구미 약목역 간에는 과거(일제 시) "사곡운전간이역"이 있었으나 해방 후 철거되었음. 역간 거리 12~3 km의 경부선 최장거리 구간임.

2. 과거는 취락(부락)의 구성면으로 봐 별 필요 없었으나 인구의 급증을 나타내는 현실태에서는 이 연변에 필히 설치해야 할 긴박한 사정임.

3. 철도이용 수지면으로 보아 부산 방면, 서울 방면 1일 승객이 130명 정도임.
°통근 통학생 80명"
"여객 50명"

4. 지방산물 출하면으로 보아 사과 만삼천사백 본, 낙화생 700석, 고구마 50,000관, 무우, 배추 20,000관임.

5. 이상의 사실을 1961년 8월 26일 당시 교통부장관께 진정한 바 있으나 당시 회신에 의하면 지리적 조건에 부적합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희들 주민생각으로서는 타 간이역에 비해 지리적 조건이 크게 구애되지 않으리라 추측됩니다.

서기 1964년 10월 3일
철도청장님 귀하.


김종길 시니어 기자 / 입력 : 2024년 06월 17일
- Copyrights ⓒ경북문화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대구취수원 이전 ‘원점 재검토’… 구미 이전안 다시 급부상..
경북보건대 스마트물류과, 쿠팡CFS 정규직 취업 성과 달성..
구미시로컬푸드직매장, 누적 매출 100억 원 돌파..
상주시, ‘2차전지 클러스터 조성사업’ 첫걸음...2030년 준공 목표..
힐링파인연구소, `웰니스 숲여행` 본격 운영..
구미대, ‘전통시장·골목상권 살리기’에 나섰다..
[신간소개]조선시대 간찰 서식집《역주 한훤차록寒暄箚錄》..
˝스마트 방제기로 일손 걱정 덜어요˝..
구미대 사이클부, 전국 대회서 금메달 4개 휩쓸어..
구미시선산보건소,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최신댓글
충돌 우려로 이승환콘서트를 금지했던 구미시장은 왜 이번엔 잠잠하지요? 정치적 선동금지 서약을 받았나요? 이건 이승환콘서트 보다 더 큰 충돌 우려가 되는 이벤트인 것 같군요.
산과 함께한 내공이 느껴집니다. 멋지네요.!!
늦은감은 있지만 향토문화유산의 조명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 기대를 하게 됩니다.
다자녀 혜택 때문에 그런거 아니고? 우리도 다자녀 농수산물 지원 5만원 사이소에서 사라길래 회원가입했는데 ...
8명이 시위 하는데 안전상의 문제라면 지나가는 개도 웃을판이네 아~ 찍새까지 9명인가?
요즘은 형곡동에서 사곡오거리로 아우토반 넘어가는 시작점부터 화물차들이 대놓고 주차해 놓던데 그 큰 도로에 화물차 주차가 말이 됩니까? 구미시는 왜 가만히 방치하는지 사고 나야 소잃고 외양간 고치려는지
특별히 개성 있는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희소성도 없고
그래서 가은중은 고려대 우리는 구미대? "
지자체나 출연기관, 보조금 단체 등이 주관하는 대부분 행사들이 취지나 명분만 포장하고 있고 내용의 진정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인사말과 자아자찬에 기념사진 남기기가 주요 사안인 것 같다. 다른 지역도 어느정도 닮은 꼴이겠지만 변화와 발전을 위한다면 좀 바뀌어야한다. 사진찍기에 동원되는 관계인들도 관계를 위한 자리가 아닌 목적과 가치를 짚어보는 자세로 이젠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구미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이라면...
뭣이 중헌디?
오피니언
《천자문》 주석에 “거야군(鉅野郡)은 태산(泰.. 
도시는 빠르게 변합니다. 낯익던 골목이 사라지.. 
-이순원의 『19세』 @IMG2@행복’의.. 
一善郡은 《삼국사기》에 선산 지명으로 처음 등.. 
여론의 광장
구미대, 나노헬스케어 500만원 상당 물품 기증 받아..  
상주시청 조선영 선수, 국제사이클대회 은빛 질주..  
구미시, 공실 원룸 활용한 청년 주거 지원사업 본격 추진..  
sns 뉴스
제호 : 경북문화신문 / 주소: 경북 구미시 지산1길 54(지산동 594-2) 2층 / 대표전화 : 054-456-0018 / 팩스 : 054-456-9550
등록번호 : 경북,다01325 / 등록일 : 2006년 6월 30일 / 발행·편집인 : 안정분 /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정분 / mail : gminews@daum.net
경북문화신문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 영상)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경북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