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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 현월봉 표지석 앞 바위에 새겨진 후망대(사진 약사암 대혜스님 제공) |
ⓒ 경북문화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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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에 파묻힌 것으로 알려졌던 고산 황기로 선생의 걸작품 후망대가 최근 금오산 현월봉 바위에서 확인됐다.
후망대는 구미 고아읍 출신의 서예가이자 초서(草書)의 대가로 ‘초성(草聖)’이라 불린 고산 황기로 선생(1521~1575(?))이 금오산 정상에 초서체로 음각한 것으로, 그동안 금오산 정상 현월봉에 미군통신기지가 들어서면서 건설과정에서 콘크리트에 파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금오산 정상 미군통신기지가 반환, 개방된 2014년 10월부터 모습이 드러났던 것이다.
1953년 한ㆍ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은 금오산 정상 2만2,585㎡ 부지에 초소와 헬기장 등으로 구성된 통신기지를 운영하면서 철조망을 설치해 일반인의 접근을 막았다. 이 때문에 금오산을 찾은 등산객들은 실제 정상을 밟아보지 못한 채 정상 10여m 아래에 머물다 내려오곤 했다.
22일 현월봉에서 후망대를 발견하고 SNS에 사진을 올린 약사암 대혜 주지 스님은 “몇 년 전 신도가 금오산 정상 바위에 글씨가 있다고 해서 가봤다. 하지만 무슨 글씨인지 몰라서 SNS에 올려 후망대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대혜 스님의 호기심 덕분에 70년 동안 잠자던 후망대가 깨어난 것이다.
구미시문화관광해설사 A씨는 "황기로 선생이 초서체로 음각한 후망대가 맞는 것 같다. 후망대가 표지석일 줄 알았는데 바위에 이렇게 새겨져 있는 줄은 몰랐다"며 "황기로의 또 다른 걸작품인 금오산 중턱 바위에 음각된 '금오동학'과 함께 원형이 훼손되지 않도록 구미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존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망대는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높고 평평한 곳’이라는 뜻이다. 구미문화원이 펴낸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상편에는 “금오산 최정상에 후망대(候望臺)라고 음각되어 있는 글자가 있으니 이것도 고산의 걸작 중의 하나라고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 후기 성주(현 왜관읍 석전리) 출신의 명암 이주대(1689-1755)의 유금오산록(遊金烏山錄)에는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 대(臺)에 오르고 난 뒤에 아래를 굽어보니 앞에는 두 개의 바위가 또한 수 백 길이나 되니 대개 성(城)이 산에서 가장 높은 곳인 듯 하였고, 대(臺) 또한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 때문에 밖에서 일어나는 변을 살피기에 반드시 이 대(臺)에서 한 것이니 대(臺)의 이름이 후망대(候望臺)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일 것이다”고 후망대를 소개하고 있다. 즉 이주대 선생은 臺가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밖에서 일어나는 변을 살폈으니 후망대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유추했다. 아마도 후망대가 음각된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군사들이 왜군들의 동태를 살피는 곳으로 활용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황기로 선생은 임진왜란 등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태어나 생을 마쳤다. 따라서 후망대가 적군들의 동태를 살피는 용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매학정에서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으로 삶을 산 황기로 선생의 일생의 보면 ‘높은 곳에 올라서서 먼 곳을 조망한다’는 의미로 금오산 정상에 올라 후망대를 음각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미문화관계자 A씨는 “후망대 발견 소식을 접하고 금오산에 올라 눈으로 확인했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텐데 발견되지 않은 것은 몰라서 일수도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글씨체가 상당 부분 훼손됐기 때문이다”며 “70년 만에 찾은 후망대가 더이상 훼손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도록 과학적인 보호시설 설치가 시급한 실정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황기로 선생이 음각한 후망대는 금오산기행 등 조선시대 문인들에 의해 자주 소개될 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다"며 "구미의 보물로 보존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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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5 19:07 삭제
지역의 고귀한 문화유산의 발견과 보존을 위한 노력에 박수와 응원을 드립니다.
08/24 22:27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