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시대 구미(선산)를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는 『일선지(一善誌)』. 구미의 사찬 읍지인 일선지는 1618년 최현(1563-1640)에 의해 편찬됐다. 최현이 일선지를 편찬하기 이전에 선산에서 만들어진 사찬 읍지는 선산부사 김종직(1431-1492)이 편찬한 『일선지도지(一善地圖誌』와 노경임(1569-1620)이 편찬한, 주로 인물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숭선지(崇善誌)』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 일선지이다. 하지만 김종직의 일선지도지는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서문만 일선지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일선은 신라 진평왕 36년(614)에 선산의 이름이다. 이는 다시 신라 경덕왕(742-764)때 숭선으로 고쳐졌고, 고려 성종 14년(995년) 선주로 개칭된 데 이어 고려 인종21(1143) 다시 일선으로, 조선 태종13년(1413)에 선산으로 붙여졌다. 즉 일선, 숭선, 선주는 모두 선산의 옛 이름인 것이다.
지난 목요일 지역사공부모임(본지 사무실에서 2주에 한 번 열리는 구미지역사 사료 공부 모임)에서 다룬 일선지의 첫 장에 나오는 김종직의 선산지리도십절(善山地理圖十絶)을 소개한다. 선산지리도에 덧붙인 한시 10수를 감상하면서 김종직이 구미지역의 어떤 지명과 인물에 대해 소개하는 지를 통해 그가 최고로 꼽는 구미·선산의 인물과 장소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선산지리도에 붙인 시는 김종직이 짓고, 최현이 주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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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충공 김선공 묘소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 전경(20210719_경북문화신문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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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김선궁)
옛집의 높은 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으니 / 故家喬木至今存
태수는 응당 먼저 이문에서 내리리라 / 太守應先下里門
반은 벼슬아치이고 반은 아전들이었으니 / 半是簪纓半刀筆
순충공의 후손이 몇 대나 내려왔는고 / 順忠公後幾雲孫
주: 대광(大匡) 김선궁(金宣弓)은 시호가 순충인데, 고려 태조(高麗太祖)를 도와 공이 있었다. 부(府)의 사족(士族) 및 향리(鄕吏)로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김선궁의 후손이다.
2절(태조산)물불 같다 지목된 자가 바로 견왕이었지만 / 指爲水火是甄王
인의가 끝내는 능히 사방을 평정하였네 / 仁義終能定四方
산중에 말 타고 전쟁한 흔적 찾아 보니 / 試覓山中盤馬處
바위틈 꽃과 시냇가 풀이 향기를 풍기누나 / 巖花澗草發天香
주: 부의 동쪽 10리쯤에 태조산(太祖山)이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맞아 싸울 적에 주필(駐驆)한 곳이라 한다.
3절(도리사)도리산 앞에는 도리의 꽃들이 피었는데 / 桃李山前桃李開
묵호자는 이미 떠나고 도사가 왔도다 / 墨胡已去道師來
신라의 빛나는 왕업을 누가 알리오 / 誰知焃焃新羅業
끝내는 모랑의 움 속의 재가 되어 버렸네 / 終是毛郞窨裏灰
주 : 도리사(桃李寺)는 부의 동쪽 15리쯤에 있다. 신라 때에 승려 묵호자가 부의 도개부곡(道開部曲) 모례(毛禮)의 집에 오자, 모례가 움집을 만들어 그를 받들었다. 묵호자가 죽자, 아도(阿道)라는 자가 또 모례의 집에 왔으므로 모례는 또한 그를 묵호자처럼 받들었다. 그런데 아도가 일찍이 동도(東都)에 갔다 돌아와서는, 겨울철인데도 산 앞에 복사꽃·오얏꽃이 성하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여기에 절을 지어 살면서 마침내 도리사라 이름하였으니, 이것이 신라 시대 불법(佛法)의 시초인 것이다.
4절(이득신) 이후가 쌓은 성이 천시를 얻었는지라 / 李侯板築得天時
왜구의 무력한 넋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네 / 海寇遊魂不敢窺
물어 보자 남은 사당이 어느 곳에 있느뇨 / 爲問遺祠在何處
허물어진 성에 가을 풀만 절로 우거졌구나 / 壞城秋草自離離
주: 고려 말기에 왜병(倭兵)이 주(州)에 침입하자, 지주사(知州事) 이득신(李得辰)이 성을 쌓아 그들을 방어하였으므로, 읍인(邑人)들이 이를 은덕으로 여겨 사당을 세워 향사했는데, 지금은 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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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장사 전경(20210129_경북문화신문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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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죽장사) 죽장암 가에는 고목들이 빽빽이 서 있는데 / 竹杖菴邊古樹攢
석반은 아직도 수성단을 누르고 있네 / 石槃猶鎭壽星壇
성신이 오늘도 남극성에 빛나니 / 聖神今日輝南極
변방인들이 장차 손으로 가리키며 보리라 / 負海人將指點看
주: 부의 서쪽 5리쯤에 죽장사(竹杖寺)가 있는데, 고려 때에 여기에서 남극 노인성(南極老人星)에 제사하였다.
6절(길재) 오산과 봉수를 이리저리 마음껏 거니노라니 / 烏山鳳水恣倘佯
야은의 맑은 바람 말하면 다시 길어지네 / 冶隱淸風說更長
밥짓는 계집종도 시 읊으며 절구질하니 / 爨婢亦能詩相杵
지금도 사람들이 정공향에 비유한다오 / 至今人比鄭公鄕
주: 길재(吉再)가 금오산(金烏山) 봉계동(鳳溪洞)에 은거하였는데,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길재의 가비(家婢)들도 곡식을 찧을 때에 또한 시사(詩詞)로써 절구질을 했다고 한다.
7절(연봉리)마을 사람이 예로부터 학교를 중히 여기어 / 鄕人從古重膠庠
뛰어난 인재들을 해마다 조정에 바치었네 / 翹楚年年貢舜廊
성 서쪽에 자리잡은 조그만 마을 영봉리를 / 一片城西迎鳳里
학도들은 아직도 장원방이라 말하누나 / 靑衿猶說壯元坊
주: 영봉리는 서문(西門) 밖에 있는데, 전가식(田可植)·정지담(鄭之澹)·하위지(河緯地)가 모두 장원을 했었다.
8절(약가)아득한 넓은 바다에 자색 봉황이 날아가니 / 滄海茫茫紫鳳騰
팔 년 동안을 외로운 등잔 벗삼아 살았도다 / 八年生理只孤燈
돌아와 시험삼아 거울 가져다 비추어 보니 / 歸來試把菱花照
뺨 위에 붉은 놀이 반쯤이나 엉기었구나 / 臉上丹霞一半凝
주: 봉계(鳳溪)에 이름이 약가(藥加)라는 열녀(烈女)가 있었는데, 그의 남편이 왜인(倭人)에게 잡혀 갔다. 약가는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무릇 8년 동안이나 고기를 먹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자곤 하다가 끝내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자 다시 부부(夫婦)가 되었다.
9절(월파정)일본의 사신이 매양 배 타고 올 때마다 / 扶桑使者每楊舲
십 리까지 잔치 마련해 송영하기 관례로세 / 十里樽牢慣送迎
성명한 임금의 성교가 멀리 미침을 힘입어 / 賴是聖明聲敎遠
고을 원이 자주 월파정을 오른다오 / 遨頭頻上月波亭
주 : 월파정은 부의 동쪽 10리쯤 되는 여차진(餘次津) 가에 있는데, 수로(水路)로 오는 일본(日本)의 사신에 대해서는 본부에서 반드시 여기에서 잔치를 베푼다.
10절(보천탄)보천탄 위에는 장삿배들이 모여들어 / 寶泉灘上集商帆
일천 가호 집집마다 소금을 먹게 되었네 / 千室人人食有鹽
누가 백성에게 착취하여 영리를 꾀하는고 / 誰要脂膏營什一
예로부터 청렴한 장관이 드물었다오 / 古來長吏罕能廉
주 : 보천탄은 해평현(海平縣) 서쪽 5리쯤에 있는데, 바다의 장사치들이 봄가을마다 이곳에 배를 대고서 물건을 팔아 가지고 돌아간다.
네 묘소라 아무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구미보가 보이기도 하고요,
이곳에 묘터를 정한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09/03 17:14 삭제
첫번째 사진 멋집니다.
가보고 싶군요.
아무나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전 일선김씨가 아니라도 가 볼 수 있나요?
09/03 10:31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