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당 박영이 모과나무 선택한 까닭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더 편안하게 보살피고 싶었다”
제20대 대통령선거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후보들은 저마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내세우는 정치교체, 정권교체가 되면 대한민국이 달라질까. 상대 후보 비방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들이 진실로 국민을 위하는 마음이 있기나 한 것일까. 조선 시대의 어느 선비는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서도 백성을 생각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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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나무에 대한 관심으로 지역의 보호수를 찾아다녔다. 보호수들이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무를 통해 역사와 인물을 풀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 송당 박영의 모과나무다. 지역 출신의 조선시대 무신이자 성리학자로만 알고 있던 송당 박영이 모과나무로 인해 새롭게 다가왔다. 백성을 생각하는 조선 시대의 휴머니스트로.
구미시 선산읍 신기리 송당정사 입구에 들어서면 모과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른 주먹보다 큰 샛노란 모과가 어찌나 탐스럽게 달려있던지.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줄기는 뿌리 부분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골고루 펼쳐져 있다. 마치 여러 나무를 심어놓은 것처럼. 모과나무의 수형이 이토록 근사한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모과나무는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이 심었단다. 그렇다면 500년은 족히 넘었을텐데, 표지석을 보니 수령이 250년이다. 박영이 키우던 나무의 후계목이다. 후손들이 선조의 귀한 뜻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다시 심은 나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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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왜 많은 나무들 중에서 모과나무를 심은 것일까.
박영에 대한 기록을 『경북의 보호수』에서 옮겨본다. 박영은 무신으로 입신출세를 시작해 나중에 성리학자로, 한의학자로 일생을 다채롭게 살았다. 선산에서 태어나 자란 박영은 스무 살을 갓 넘긴 1492년에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무관으로 공을 떨쳤지만, 그는 학자로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꿈을 꾸고 무과 급제 후 3년 만에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 돌아왔다. 낙동강이 내다보이는 이곳 언덕마루에 송당정사라는 집을 짓고 학문 탐구에 몰입했다. 기초부터 다져야 했던 박영은 고향 마을에서 조선 성리학의 정통 학맥을 이어가던 신당(新堂) 정붕(鄭鵬 1467~1512)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정붕은 그의 열의를 받아들였고, 박영은 자신보다 네 살 연상인 정붕을 스승으로 삼고 ‘대학’과 경전을 배워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 지식을 완전하게 함)에 힘써 깨닫는 이치가 많았다.
두 사제 사이의 문답으로 '냉산문답'이 유명하다. 박영이 3년간 대학을 만독한 후 이뤄진 문답이다. 신당이 "여보게 송당 저 산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라고 묻자 이에 송당이 "산 밖에는 산이 있지요"라고 답했다는 것. 첫번째 물음에는 답 못하다가 이후 두번째 물음에 응답한 것이다.
박영이 의술로 학문의 폭을 넓힌 건 고향에 돌아와 성리학에 열중하던 즈음이었다. 전장의 지휘관으로 지내면서 사람들의 생과 사를 몸소 마주하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야 했던 그로서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만큼 요긴한 학문이 없다고 생각했다. ‘실천성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 분야에 몰입하던 끝에 그는 마침내 의술에 매진했다. 이미 적지 않은 부상자 치료의 경험을 가졌던 그는 의술 공부에 능력을 보였다. 인근에 효험 있는 명의로서 이름을 알리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경험방』, 『활인신방』같은 의학 관련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독학으로 성취한 의학의 경지가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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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나무를 심은 때는 한창 의술로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면서다. 많은 나무 중에서도 그가 모과나무를 선택한 건 약재가 필요한 때문이었다. 모과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없지만 예로부터 약재로 요긴하게 쓰였다. 특히, 기침, 감기를 비롯해 구토, 설사와 위장병에 효험이 있었다. 백성들이 흔히 겪는 질환이지만 제대로 된 치료법을 가지지 못하던 때, 박영은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더 평안하게 보살피고 싶었다. 특별한 질병이 아니라 가장 흔한 병에 눈길을 돌린 것이다. 모과나무를 선택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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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안이 박영의 모과향으로 가득하다. 지난 가을 가져온 모과가 이제는 조금씩 썩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달콤한 향을 내뿜고 있다. 500여년 전 박영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적잖은 위안이다. 모과나무가 있는 송당정사는 또 어떠한가. 낙동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낮은 언덕마루에 서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린다. 박영도 공부를 하다가 가끔씩 이처럼 낙동강을 내다보았으리라. 백성을 위한 따뜻한 박영의 마음은 지금도 이렇게 우리를 편안하게 보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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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정사는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언제든지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낙동강의 절경을 감상하시기 좋을 듯합니다.
답답할 때 한번씩 찾아가면 좋은 그런 쉼터입니다.
역사의 흔적은 추석지나고 부지런히 올리겠습니다.
덕분에 자극을 받습니다. 관심 고맙습니다.
09/03 17:24 삭제
댓글 수정하려고 했더니 수정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봅니다.
역사의 흔적 3탄은 언제 나오나요?
송당정사는 혹시 개인 소유인가요?
언제나 가서 볼수있는 거죠?
09/03 10:21 삭제